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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Samuel Huntington's The Clash of Civilizations) 그리고 한반도.

제목과 표지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

(Samuel Huntington's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the World Order)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세계질서의 재확립.

미국무장관을 지냈고 세계적 정치 외교 전문가인 헨리 키신저는 다음과 이 책을 추천하였다 

'One of the most important books to have emerged since the end of the cold war'

' 냉전의 종말 이후 나온 가장 중요한 책들중 하나'

그리고 십자가(그리스도교 권역), 별 (그리스도 정교권) , 초승달 (이슬람교), 태극(유교권) 표시는

공산,자유주의 이념으로 갈라져 싸우던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각 종교,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명의 충돌이 일상화 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이슬람의 미국 911 테러와 서구에서 현재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여러 테러들, 중국의 패권국화, 북한의 핵보유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여러모로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은 세계를 다음과 같이 9개의 문명으로 권역화해 나누고 있다.

1. Western 서구 그리스도교 2. Orthodox 그리스 정교 3. 이슬람 4.  힌두 5. 불교 6. Sinic 중화 7. 일본  8. 아프리카 9. 라틴 아메리카.

한국사람들은 헌팅턴의 이 문명지도에 발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Sinic , 즉 중화권에 속해 있고 일본은 자체 문명으로 나뉘어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헌팅턴 교수의 지도는 불편하지만 정확하다. 진실은 원래 불편하다. -


예전에 들리지 않던 비행기 소음이 올해 초부터 갑자기 들리기 시작해 시청에도 전화해 봤지만 시청 담당자도 전혀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모르는 처억~ 하는지 모르지만 자신들은 모른다고 말했다. 이곳 저곳 알아보다  flightradar24란 앱을 다운받아 비행 경로를 추적해 보았는데 항공기가 

초저녁에는 동시에 3대정도가 내가 사는 동네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저곳 검색해 보니 공식적 발표는 없었지만 북한 미사일 발사로

싱가포르 항공과 프랑스 항공등이 항공경로를 바꿨다는 기사를 보고 역시 나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북한과 대치하고 

살아 오면서 면역이 되어 북핵 위기가 얼마난 위험한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북한 핵위기는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 이곳 저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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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세계 질서의 재확립(Samuel Huntington's 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the World Order)는

1995년에 발간된 책이다. 22년이나 지난 이 책을 지금에야 읽고 그 엄청난 혜안에 깜짝 놀라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상공으로 갑자기 예전에 없던 민간 항공기들이 날아들어 소음을 일으키기 시작해 몸소 느끼기 시작한 북핵과 한반도의 전쟁의 그림자가 

아이러니하게도 22년이나 지난 이 엄청난 책을 뒤늦게라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계는 물론 자신의 주변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정말 강추한다. 이 책이 22년전에 예언했던 것이

어떤 것이 일치했고 어떤 것은 틀렸는지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혹자는 22년이 지난 책을 뭘 읽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무려 5백년전인

1513년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어떠한가??? 이 책은 사실 군주론 이상으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지금의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바로 취하게 해 줄 수 

비젼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명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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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전에 새뮤얼 헌팅턴은 현재 북한 지도층이 핵무기에 집착하는 이유와 한국인들의 핵에 대한 이중성을 잘 설명해 준다. 결국 북한은 그 뜻을 이루었다.)


  무기 확산


  군비 확산은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파생물이다. 일본 중국, 아시아 각국은 경제력이 커지면서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슬람 국가들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경제 개혁이 성공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력 강화도 예상된다. 20세기의 지난 몇 십 년 동안 비서구 국가들은 서방국, 러시아, 이스라엘, 중국으로부터 첨단 무기를 확보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도의 첨단 무기를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21세기 초반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가서도 상당 기간 동안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문명은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아래 주도하는 서구 문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공습을 감행할 수 있는 공군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는 여전히 미국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미국을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게 하고 서구를 세계의 주도적 문명으로 남아 있게 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서구와 비서구의 군사적 균형에서 서구의 압도적 우위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첨단 재래식 무기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시간과 노력, 비용 때문에 비서구 국가들은 서구의 재래식 군사력에 맞설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가장 손쉬운 길은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문명의 핵심국들과 지역 패권을 누리고 있거나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들은 특히 그런 무기 확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한 무기는 먼저, 그것을 보유한 국가들이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 주며,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외세가 자기네 문명이나 지역에 쉽게 개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력을 제공한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손에 넣을 때까지 후세인이 쿠웨이트 침공을 2, 3년만 늦추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쿠웨이트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도 독차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서구 국가들은 걸프전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북한의 군사 관계자들이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군사력을 배치할 여유를 주지 말라. 공군력을 증강할 틈을 주지 말라. 미국이 기선을 잡지 못하게 하라. 미군의 인명 피해를 최대화하라." 인도의 한 고위 군 장성의 지적은 더 노골적이다. "핵무기가 없거든 미국과 싸우지 말라!" 그러한 교훈은 비서구 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군 관계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면서 다음과 같은 개연성 높은 전망을 낳았다. '미국은 핵무기를 가진 나라와는 싸우지 않는다.‘

  핵무기는 예전처럼 패권 정치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패권국들이 맡은 역할이 축소되고 국제 체제의 분열 추세를 공고히 한다.' 고 프리드먼(1awrence Freedman)은 지적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서구에게 지니는 의미는 냉전 시대의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냉전 당시 미국의 애스핀 국방 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서구는 핵무기를 통하여 소련에 대한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였다. 핵무기는 '균형추' 였다. 그러나 탈냉전 세계에서 미국은 재래식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이제는 미국의 잠재적 적수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한다. 과거의 소련처럼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잃게 될지 모른다.

  따라서 러시아가 자국의 방위 계획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새삼 강조하면서 1995년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추가로 대륙 간 미사일과 탄두를 구입하기로 합의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1950년대에 우리가 러시아 측에게 했던 말을 지금 그대로 되듣고 있다." 고 미국의 한 무기 전문가는 지적한다. 이제는 러시아 측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핵무기를 도입하는 것은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다." 비슷한 역전 현상으로, 냉전 시대의 미국은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탈냉전 세계에서 핵무기가 갖는 전쟁 억지력을 새롭게 주목하면서 러시아는 1993년 과거 소련이 견지하였던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탈냉전 시대의 제한적 억지력에 입각한 자신의 핵전략을 발전시키면서 1964년에 표명한 바 있는 선제 핵 공격 포기 의지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며 그 의지를 약화시켰다. 다른 핵심국들과 지역 강국들도 핵무기나 기타 대량 살상 무기를 확보하면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 서구의 재래식 무기에 자신의 무기가 갖는 억지력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핵무기는 서구를 더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핵탄두를 장착한 탄도 미사일을 유럽과 북미에 보낼 수 있다. 북한, 파키스탄, 인도는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계속 넓히고 있으며 언젠가는 서구를 직접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는 다른 수단으로 전용될 수도 있다. 군사 분석가들은 테러, 산발적 게릴라전 등의 저강도전에서 제한전, 재래식 무기가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전면전, 나아가 핵전쟁까지 충돌의 다양한 수위를 상정한다. 역사적으로 테러는 약자의 무기, 곧 재래식 군사력을 갖지 못한 세력의 무기였다. 2차 대전 이후 핵무기는 약자가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과거의 경우 테러리스트들은 제한적 폭력밖에 행사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여기서 몇 명 죽이고 저기서 건물을 파괴하는 정도였다. 대규모 폭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사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가면 소수의 테러리스트가 대규모 살상, 대규모 파괴를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테러와 핵무기는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무기이다. 이 둘이 결합할 때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힘은 강해질 것이다.

  탈냉전 세계에서 대량 살상 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이슬람권과 유교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파키스탄과 북한은 소수의 핵무기를 가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단기간 안에 핵무기를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할 것이며, 핵무기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거나 입수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라크는 상당 수준의 화학전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생물 무기와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포괄적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사정거리를 확대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88년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은 '이란은 화학 무기, 박테리아 무기, 방사능 무기를 공격적으로도 방어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무결하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3년 뒤 이란의 부통령은 이슬람 회담에서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가 지속되는 한 우리 이슬람교도는 핵 확산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합심하여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1992년과 1993년에 미국의 고위 정보 관계자는 이란이 핵무기를 입수하고자 심혈을 쏟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1995년 크리스토퍼 미 국무 장관은 '현재 이란은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다.' 고 못 박았다. 핵무기 개발에 관심을 가진 여타 이슬람 국가들로는 리비아, 알제리,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거론된다. 마즈루이의 화려한 표현대로 버섯구름 위에 걸린 초승달-이슬람을 상징: 옮긴이)은 서구 외의 다른 지역에도 위협을 가할 수 있다. 이슬람은 결국 남아시아의 힌두교 세력과 중동의 시온주의, 유대주의 세력을 대상으로 핵무기를 통한 러시안 룰렛 게임을 벌일지도 모른다.

  군사 부문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유교-이슬람 결속에서 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이슬람 국가들에게 재래식 무기와 비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용임을 표방하지만 상당수의 서방 전문가들이 플루토늄 생산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알제리 사막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원자로 건설, 리비아에 대한 화학 무기 원료 판매,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CSS-2 중거리 미사일 제공, 이란, 리비아, 시리아, 북한에 대한 핵 기술 및 핵 물질 공여, 이라크에 대한 막대한 규모의 재래식 무기 판매의 주역은 모두 중국이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 뒤이어 북한이 이란을 거쳐 시리아에 스커드 미사일을 제공하였으며 다시 그것을 발사할 수 있는 이동 포대를 제공하였다.

  유교-이슬람 군사적 유대의 핵심 고리는 한 축에 중국과 북한이 있고 다른 한 축에 파키스탄과 이란이 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의 무기를 주로 도입한 나라는 이란과 파키스탄이었고 그 뒤를 이라크가 따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파키스탄은 대단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1989년 양국은 향후 10년 간 무기 구입, 공동 연구와 개발, 공동 생산, 기술 이전은 물론 상호 합의에 의한 제3국 수출 분야에서 군사적 협력을 도모한다는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파키스탄의 무기 구입에 중국이 보증을 하는 내용이 추가로 들어간 협정이 1993년 체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사실상 거의 모든 군사 관련 수출품을 파키스탄군의 모든 부분에 양도함으로써 파키스탄에게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군사 하드웨어를 제공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파키스탄의 제트기, 탱크, 대포, 미사일 생산 시설의 건설을 도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결정적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파키스탄에 농축 우라늄을 제공하고 탄두 설계에 조언을 제공하였으며, 중국의 핵실험 지역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다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고 300킬로미터의 시정 거리를 갖는 M11 탄도 미사일을 파키스탄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약속을 파기하였다. 그 대가로 중국은 파키스탄으로부터 공중 급유 기술과 스팅어 미사일을 확보하였다.

  1990년까지 중국과 이란의 무기 교역 또한 강화되었다. 1980년대의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중 중국은 이란 무기의 22퍼센트를 제공하였으며 1989년에는 단일 국가로서는 이란에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은 또한 핵무기를 확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란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최초의 중국-이란 공동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두 나라는 1990년 1월 과학 기술 협력과 군사 기술 이전 분야에서 10년 기한의 양해 각서에 서명하였다. 1992년 9월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이란의 핵 전문가들을 대동하고 파키스탄을 방문한 뒤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핵 협력 조약을 체결하였다. 1993년 2월 중국은 이란에 300메가와트급의 원자로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였다. 이들 조약에 따라 중국은 핵 관련 기술과 정보를 이란에 이전하고 이란 과학자와 기술자를 훈련시켰으며 이란 측에 우라늄 농축 장비를 제공하였다. 1995년 미국의 계속되는 압력 때문에 중국은 2기의 300메가와트급 원자로 판매를 미국의 표현에 따르면 '취소' 하였고 중국의 설명에 따르면 '유예'하였다. 중국은 미사일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이란에 제공한 주요국이었다. 그 중에는 1980년대 말 북한을 거쳐 제공한 실크윔 미사일과 1994~95년에 제공한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에 이르는 미사일 유도 시스템과 컴퓨터 기기가 포함된다. 중국은 또 중국 지대지 미사일의 이란 현지 생산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지원에 동참하여 북한도 스커드 미사일을 이란에 선적하였으며 이란의 미사일 생산 시설 건설을 도왔고 1995년에는 사정거리가 600마일인 노동 1호 미사일을 이란에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삼각 공조의 세 번째 축으로서 이란과 파키스탄도 핵 부문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전개하였다. 파키스탄은 이란의 과학자들을 훈련시켰으며, 1992년 11월 파키스탄, 이란, 중국은 핵 개발을 공동 추진하는 데 합의하였다. 파키스탄과 이란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 계획에 대한 중국의 광범위한 지원은 이들 국가 간에 대단히 긴밀한 공조와 협력이 펼쳐지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서구의 이익에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서구 안보 레이더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가령 1990년 미국인의 59퍼센트가 핵무기 확산 저지를 가장 중요한 외교적 목표로 지적하였다. 1994년 미국 일반 국민의 82퍼센트, 외교 전문가의 90퍼센트가 가장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과제로 이 문제를 꼽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9월 핵 확산 저지에 중점을 두겠다고 선언하였으며, 1994년 가을에는 핵무기, 생물 무기, 화학 무기의 확산과 그러한 무기를 실어 나르는 수단의 확산으로 야기되는 미국의 국가 안보, 외교 정책, 경제에 미치는 유례없는 엄청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91년 C1A는 100명의 상근 직원을 거느린 비확산 센터를 창설하였으며, 1995년 12월에는 애스핀 국방 장관이 새로운 확산 저지 방위안을 발표하고 핵 안보 및 확산 저지 담당 차관직을 신설하였다.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은 첨단 핵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수단을 거듭 개발하면서 고전적인 무기 경쟁을 벌였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의 겨룸이었다. 탈냉전 시대의 지배적인 군사력 경쟁은 이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구를 적대시하는 세력은 대량 살상 무기를 손에 넣으려 하고 서구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증강 대 증강이 아니라 증강 대 억제의 싸움이다. 서구의 핵 군사력은 규모나 파괴력 면에서, 허세를 부린다면 모를까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증강 대 증강의 구도로 펼쳐지는 무기 개발 경쟁은 결국 양측의 자원, 의지, 기술력에 따라 좌우 된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하다. 반면 증강 대 억제의 구도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는 예측 가능하다. 서구의 억제 노력이 다른 국가들의 무기 증강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비서구 국가들의 경제 발전, 무기, 기술, 정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경제적 유혹, 자신의 지역 헤게모니를 수호하려는 핵심국과 지역 강대국의 정치적 욕구 등은 서구의 억제 노력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서구는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는 것이 국제 질서와 안정에 기여하고 모든 국가의 이익을 낳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이것을 서구의 헤게모니 고수 전략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을 놓고 미국과 지역 강국이 보이는 불안의 차이에도 반영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역이 한반도이다. 1993년과 1994년에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위기의식을 가졌다. 1993년 11월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폭탄 개발을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상원, 하원, 부시 행정부에서 활약한 관리들은 북한의 핵 시설물에 대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검토하였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세계적인 핵 확산 추세에 대한 불안 심리에 그 뿌리가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활동을 제약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만일 북한이 핵 기술이나 핵무기를 수출할 경우 남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한국은 핵무기를 지역적 이해의 구도에서 파악하였다. 다수의 한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를 한민족의 핵무기로 이해하였다. 핵폭탄을 같은 동포의 머리 위에 떨어뜨릴 리는 만무하므로 일본과 그 밖의 잠재 위협 세력으로부터 한민족의 주권을 수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북한의 핵무기를 받아들였다. 한국의 관리들과 군관계자들은 통일 한국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다. 한국의 이해는 잘 반영되었다. 핵무기 개발에 뒤따르는 희생과 국제적 오명은 북한이 짊어져야 하는 반면 한국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승계 받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와 한국의 발달한 산업이 결합하면 통일 한반도는 동아시아 무대에서 실력 국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1994년에는 한반도에서 커다란 위기를 감지하는 워싱턴과 이렇다 할 위기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서울 사이의 현격한 인식 차이는 양국 수도의 공포 격차를 낳았다. 1994년 5월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 저널리스트가 지적한 것처럼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대치 상태에서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은 한반도에서 멀어질수록 위기감이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인식의 격차는 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이해와 그 지역 강대국들의 안보 이해 사이에서도 발생하였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핵 확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데 비해 정작 이 지역 사람들은 그리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두 나라의 핵무기를 동결, 축소하거나 아예 폐기하도록 하자는 미국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상대국이 가하는 핵 위협을 무난히 수용하는 편이다.

  대량 살상력을 가진 '균형추' 무기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서방의 노력은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공언이 있은 지 한 달 뒤 미 정보부는 북한이 한 두 개의 핵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 후 미국의 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증강하지 못하도록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철회시키거나 중단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며 이란의 핵 개발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95년 4월에 열린 핵확산 금지 조약 회의에서 핵심적으로 부각된 사안은 이 조약을 25년 동안 한시적으로 연장할 것이냐 아니면 무기한 연장할 것이냐 였다. 미국은 무기한 연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들은 5대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대폭 감축하는 조치가 수반되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섰다. 거기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조약에 서명하고 핵 안전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무기한 연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미국은 압력, 회유, 협박을 유효적절하게 구사하는 전략으로 무기한 연장안을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통과 시켰다. 이집트와 멕시코만 하더라도 무기한 연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입장을 무작정 고수 할 수만은 없었다. 조약은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최종 토의에서 7개 이슬람 국가 (시리아, 요르단, 이란, 이라크, 리비아, 이집트, 말레이시아)와 아프리카 1개국-나이지리아)은 반대 견해를 공표하였다.

  1993년 미국의 정책이 강하게 반영된 서구의 일차적 목표는 핵확산 금지에서 핵확산 대응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핵의 부분적 확산은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앞으로 미국의 정책은 핵확산 대응에서 핵확산 조절로, 그리고 만약 미국 정부가 냉전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핵확산을 통하여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도모하는 길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1995년 현재 미국과 서구는 억제 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핵을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은 다문명 세계에서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 분산의 중심적 현상이다.



(한국사람들은 지금도 중국을 짱깨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이 하버드대학의 석학과 여러 저명한 학자들은 22년전 벌써 중국을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헤게모니: 견제와 편승


  6개의 문명, 18개의 나라,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국가 간의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이를 가진 동아시아는 21세기 초반에 들어가 다양한 국제 관계의 틀 가운데 어느 하나로 발전할 것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지역 강대국과 실력국이 관여하는 아주 복잡한 협력과 갈등의 조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 어쩌면 인도가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강대국 중심의 다극 체제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혹은 동아시아의 정치가 중국과 일본 또는 중국과 일본의 양극 구도로 재편되고 나머지 나라들은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증립을 지키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아니면 동아시아 정치가 베이징을 중심으로 권력의 위계가 형성되는 전통적 단일 질서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 만일 중국이 21세기에 들어가서도 높은 수준의 경제 성장을 유지하고 덩샤오핑 사후에도 정치적 통합성을 유지하며 후계자 문제를 원만히 해결한다면, 중국은 맨 마지막 시나리오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동아시아의 정치 구도에서 다른 국가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의 역사, 문화, 전통, 영토, 경제적 역동성, 자기 인식은 모두 동아시아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목표 설정은 눈부신 경제 발전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소련 다른 강대국들도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혹은 그 직후에 대외 팽창, 자기주장, 제국주의의 길로 나섰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중대가 중국에 그와 같은 효과를 미치지 않으리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중국은 2천 년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한 나라이다. 이제 중국인은 그 역사적 역할을 되찾아 1842년 영국의 강압으로 맺은 난징 조약을 시발점으로 1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서구와 일본에 대한 굴욕과 종속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은 축적되는 경제 자원을 군사력 증강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지속되면 대대적인 군사력 증강 계획도 차질 없이 추진될 것이다. 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의 군사 예산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1988년에서 1993년 사이에 중국의 군사 예산이 명목상으로는 2배로 늘었고 실질적으로는 50퍼센트 늘었다. 1993년도 중국 군사비 지출액은 공식 환율로 대략 220억 달러에서 570억 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할 경우 중국의 국방비는 최고 900억 달러까지 치솟는다. 1980년대 말 중국은 군사 전략의 기본틀을 새로 짜,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침공에 맞서는 방어전 개념에서 세력 확대에 주안점을 둔 지역 안보 전략으로 바꾸었다. 이 전략 변화에 발맞추어 중국은 해군력 확충, 최신 장거리 전투기 확보, 공중 재급유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항공모함 도입을 결정하였다. 중국은 또한 러시아와 상호 이익이 되는 무기 구매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지배국이 되려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발전은 점점 중국 의존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급속한 성장에다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경제 발전에 화교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늘고 있다. 더욱 위협적인 것은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점점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패러셀 제도에 기지를 건설하고, 1988년에는 베트남과 일부 도서 지역에서 교전을 벌였으며, 필리핀 근해의 미스치프 산호초에 함정을 파견하고 인도네시아의 나투나섬 인근 유전에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중국은 또한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암묵적으로 두둔하던 종래의 입장에서 벗어나 미군 철수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은 냉전 시대와는 일본의 방위력 증강을 은근히 촉구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우려를 점차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지역 헤게모니를 노리는 국가의 전형적 행동에 맞추어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군사적 우위를 확립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최소화하려고 노력 중이다.

  남중국해 같은 극히 드문 사안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주의는 직접적 무력 사용에 의한 지배 영토의 확대로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은 일률적으로 적용시키지는 않겠지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전부 또는 일부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 중국의 영토적 자주성, 중국의 티베트. 신장 지배, 홍콩. 대만의 중국 귀속을 지지한다.

  * 남중국해, 나아가서는 몽골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묵인한다.

  * 경제, 인권, 무기 확산, 기타 사안에 대한 서방과의 마찰에서 대체로 중국을 지지한다.

  * 이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우위를 받아들이고 그 우위에 도전할 수 있는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의 확보를 자제한다.

  * 중국의 이익에 부합되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무역 투자 정책을 채택한다.

  * 지역 문제 해결에서 중국의 지도력을 존중한다.

  * 중국인 이민을 대체로 폭넓게 받아들인다.

  * 자국 내의 반중국, 반화교 운동을 금지하거나 억압한다.

  * 중국 본토의 친척이나 고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 등 자국 내에 거주하는 화교의 권리를 존중한다.

  * 다른 강대국들과의 군사 동맹 또는 반중국 연합 결성을 하지 않는다.

  * 동아시아의 광범위(?) 소통어로서, 영어의 보완어, 궁극적으로는 대체어로서 중국어 사용을 장려한다.


  분석가들은 중국의 등장을 19세기 후반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빌헬름 치하의 독일에 비유한다. 새로운 패권국의 출현은 늘 고도의 불안을 야기하지만, 중국이 패권국으로 떠오를 경우 그것은 1500년 이후 세계 역사에 등장한 모든 패권국들을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 "중국이 세계를 뒤흔들면 세계는 새로운 균형을 되찾기까지 30년에서 40년이 걸릴 것이다. 중국은 그저 또 하나의 열강일 뿐이라고 깎아 내려도 소용없다. 중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주역이다." 1994년 리콴유는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국의 경제 발전이 10년만 더 계속되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통합성이 유지된다면(그럴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 국가들과 전 세계는 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주역의 점증하는 자기주장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게 보아서 국가들은 새로운 강국의 출현에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 또는 둘의 조합으로 대응할 수 있다. 혼자 또는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서 신흥 강국을 견제하고 억제하며, 필요하다면 전쟁까지도 불사하면서 자신의 안보를 지키려고 시도할 것이다. 아니면, 신흥 강국에 편승하여 적응하면서, 자신의 중요한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아래 신흥 강국과의 관계에서 이차적 지위 또는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또는 편승과 견제를 혼합하는 전략도 있지만, 이것은 신흥 강국을 적으로 만들면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봉착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전략이다. 서구식 국제 관계 이론에 따르면 편승보다는 견제가 대체로 바람직한 선택이고 또 실제로 더 많이 애용되어 온 전략이다. 월트(Stephen Walt)는 이렇게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의도를 계산할 때 국가들은 균형을 택함이 온당하다. 합류는 위험 부담이 크다. 신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국가들은 패권국이 변함없는 온정을 베풀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패권국을 돕는다. 패권국이 공격적으로 나올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견제가 더 안전하다. 더욱이 약한 쪽에 붙으면 거기서 태동하는 동맹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커진다. 약한 쪽에서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서남아시아 지역의 동맹 구도에 대한 월트의 분석은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할 때 국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견제를 채택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유럽의 근대사에서도 견제 행위가 일반적 관행이었다. 여러 열강들은 펠리페 2세, 루이 14세, 프리드리히 대제, 나폴레옹, 빌헬름 황제, 히틀러가 야기한 위협을 견제하고 억제하려고 동맹 관계를 변화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국가들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편승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점을 월트도 인정한다. 슈웰러(Randall Schweller)의 주장에 따르면 부상하는 강국에 편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은 수정주의로 기우는 국가들이다. 그들은 현재 구도에 불만을 느끼며 그 구도를 변화시키는 데서 이익을 챙기려 든다. 편승은 패권 국가가 사악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는 데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견제를 추구하는 국가들은 일차적 또는 이차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첫째, A국가는 자신이 잠재적 적수로 간주하는 B국가를 견제하고자 C국가나 D국가와 동맹을 맺거나 자국의 군사력과 기타 역량을 강화하거나-이것은 군비 경쟁의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수단들을 결합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A국가와 B국가는 서로에게 일차적 견제국이다. 둘째, A국가는 당장은 이렇다 할 잠재적 위협 국가를 발견하지 못하지만 지나치게 강력해질 경우 자국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B국가나 C국가의 상호 견제를 부추기는 데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A국가는 B국가와 C국가에게 이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하며, B국가와 C국가는 서로에게 일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한다.

  중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할 때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반응의 양태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중국이 미국을 자신의 주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미국의 지배적 여론은 일차적 견제국의 지위를 가진 미국이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런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일 강대국이 유럽이나 아시아를 지배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 미국의 전통적 이해에도 부합한다. 그 목표는 유럽에서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아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미국과 서유럽의 느슨한 연합체는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강하며 통합성을 유지하는 강력한 중국의 등장은 그렇지 않다. 필요하다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저지하고자 전쟁을 불사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중국의 경제 발전이 계속된다면 중국은 21세기 초반에 가서 미국의 정책 입안가들이 직면할 가장 심각한 안보 위협국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헤게모니를 저지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그런 목적을 위하여 일본과의 동맹 노선에 수정을 가하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며 아시아 지역에 미군을 증강 배치하고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투입 역량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중국의 헤게모니를 저지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보편주의를 철회하고 중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이고 태평양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미칠 수 있는 자국의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는 현실을 흔쾌히 수용해야 한다. 어떤 노선을 택하건 만만치 않은 희생과 위험이 뒤따른다. 가장 큰 위험은 미국이 명확한 선택을 하지 않아 전쟁이 자신의 국익에 보탬이 되는지를 심도 있게 검토하지 않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미국은 다른 강대국이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 역할을 할 때 이차적 견제국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일본인데, 일본이 그렇게 되려면 그들의 정책이 크게 바뀌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재무장이 강화되고 핵무기를 확보해야 하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지지를 둘러싸고 중국과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한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 연합에 동참할 가능성은 있지만 실은 그 가능성도 불투명하다-일본이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이차적 견제국 역할을 하는데 이렇다 할 관심이나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나폴레옹 시대에 미국은 새로운 강국으로서 이차적 견제국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가 결국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20세기 전반기에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상호 견제를 촉발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다가 손상된 균형을 회복하고자 뒤늦게 세계 대전에 뛰어들어야 했다. 냉전 시대의 미국은 소련의 일차적 견제국 역할을 맡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이차적 견제국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차적 견제국이 되려면 섬세하고 유연하고 애매모호하고 때로는 음흉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 미국의 가치 기준으로는 도덕적으로 옳아 보이는 국가를 지원하지 않거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국가를 지원하는 등 상황에 따라 지지 대상을 기민하게 바꿔야 하는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일차적 견제국으로 떠오른다 하더라도 미국이 과연 그런 균형 관계를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미국은 두 잠재적 위협국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기보다는 기존의 한 위협국에 직접적 압력을 가하는 데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시아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편승을 선호하는 성향이 강하며 이러한 성향은 이차적 견제를 시도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다.

  편승이 신뢰에 바탕을 둔다면 여기서 세 가지 명제가 도출된다. 첫째, 편승은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된 나라들보다는 같은 문명에 속하거나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신뢰도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어린 소년은 다른 소년들과 겨룰 때는 자기 형을 편들겠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형을 상대적으로 덜 신뢰 할 것이다. 따라서 상이한 문명에 속한 나라들 사이의 교류가 잦아질수록 문명 내부의 편승 성향은 강화되게 마련이다. 셋째, 편승이나 견제의 성향은 문명마다 다르다. 소속국 사이의 신뢰도가 문명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중동 지역에서 견제가 지배적 구도로 나타나는 것은 아랍과 기타 중동 문화에서 내부적 신뢰도가 아주 낮은 수준에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요인들 외에도 편승이나 견제의 성향은 힘의 분포에 대한 기대나 선호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유럽 국가들은 절대주의의 단계를 거쳤지만 아시아의 역사를 관통하는 견고한 관료주의 제국이나 '동양적 전제주의'는 겪지 않았다. 봉건제는 권력의 분산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신념과 다원주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국제 차원에서도 세력 균형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가의 책임은 세력 균형을 수호하고 견지하는 데 있었다. 균형이 깨뜨려질 위기에 처하였을 때는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견제 행동이 요청되었다. 요컨대, 유럽식 국제 사회 모형은 유럽식 국내 사회 모형의 확대판이었다.

  반면에 아시아의 관묘주의 제국은 사회적, 정치적 다원주의나 권력의 분산을 위한 틈새를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유럽과는 달리 중국에서 편승은 견제에 비하여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으로 보인다. 파이(1uc1an Pye)는 '1920년대에 군벌들은 강자에 붙었을 때 어떤 잇속을 챙길 수 있는지를 먼저 점검한 다음에야 약자와 연대하였을 경우의 이득을 계산하였다. …… 세력 균형을 도모해 온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중국의 군벌들에게 자립성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들은 패권과의 결탁 가능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고 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골드스타인(Avery Goldstein)은 권위 체계가 비교적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던 1949년부터 1966년까지 편승은 중국 공산주의 정치 구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문화 혁명을 계기로 권위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한편 정치적 주역들의 생존 가능성이 위태로워지자 견제를 추구하는 행동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이후 명확하게 규정된 권위 체계가 회복되자 편승이 다시 정치 행위의 지배적인 양태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중국인은 국내 문제와 국외 문제의 구분선을 명확하게 긋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한 세계 질서는 중국 내부 질서의 필연적 귀결, 따라서 중국이라는 문명적 정체성의 화장된 투사에 다름 아니었으며 중국의 문명적 정체성은 같은 중심점으로부터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는 올바른 우주 질서로서의 원 안에서 재생산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맥파커(Roderick MacFarquhar)는 '중국인의 전통적 세계관은 세세하게 분절된 위계 사회에 대한 유교적 이상을 반영한다. 외국의 군주나 정부는 중국에 예속된 존재로 이해된다. 하늘의 해가 둘이 아니듯 이 세상의 황제도 둘일 수 없다.' 라고 그 점을 표현하였다. 자연히 중국인은 다극적 또는 다변적 안보 개념에 이질감을 갖는다. 아시아인은 대체로 국제 관계에서 위계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이 없으며 유럽식의 헤게모니 전쟁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유럽 역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원활하게 기능하는 세력 균형 체제가 아시아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이 몰려들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중국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나라들은 다양한 수준으로 베이징에 종속되거나 베이징과 협력하거나 베이징으로부터 자율성을 누렸다. 물론 세계 질서의 유교적 이상은 현실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치의 아시아적 위계 모형은 유럽적 균형 모형과 아주 대조적이다.

  이러한 세계관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편승을 지향하는 중국인의 성향은 국제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이 개별 국가의 외교 정책을 규정하는 정도는 그 나라가 유교 문화를 공유하는 정도,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중국과 공통점이 많으며 역사적으로도 중국에 기울어져 왔다. 싱가포르는 냉전 시대에 중국 공산당과 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미국 등이 중국의 현실적 패권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화교 인구가 많고 지도층의 반서구 의식이 강한 말레이시아는 역시 중국 쪽으로 강하게 기울었다. 태국은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와 타협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베트남이 야기하는 잠재적 안보 위협도 태국을 중국에 접근시키는 요인의 하나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억제할 만한 성향이 있는 두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이다.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많고 이슬람 국가이며 중국과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지원이 없으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할 능력이 없다. 1995년 가을 인도네시아와 호주는 자국 안보가 적대적 도발에 직면할 경우 공동의 대처 방안을 모색하자는 내용의 안보 협약을 체결하였다. 두 나라는 이것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협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지만 적대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로 중국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유교 문화의 뿌리가 깊지만 역사적으로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맺어 왔고 1979년에는 잠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중국이 서로 스프래틀리 제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양국 해군이 간헐적으로 교전을 벌인 적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들어와 베트남의 군사력은 중국의 군사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동아시아 국가보다도 베트남은 중국 견제를 위하여 공조를 취할 수 있는 동반국들을 찾아 나서려는 욕구가 강하다. 1995년에 이루어진 베트남의 ASEAN 가입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는 두 가지 조치였다. 그러나 ASEAN이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을 뿐 아니라 ASEAN이 중국에 맞서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ASEAN이 반중국 연합으로 발전하거나 베트남이 중국과 맞설 때 베트남을 지원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국은 ASEAN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지가 강한 나라지만 1990년대 중반 현재로서는 미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결국 베트남으로서는 중국에 순응하고 핀란드화. -강대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면서 중립을 지키는 노선: 옮긴이)를 수용하는 것이 '가장 피해가 적은 방안'일 수 있다. 이것은 베트남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겠지만 생존은 보장될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 중국과 북한을 제외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이 계속 적인 미군 주둔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대체로 중국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필리핀은 자국에 있는 미군의 주요 해군 기지와 공군 기지를 폐쇄하였고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의 대규모 주둔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1994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에 군사적 개입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이들 국가 해역에 6척의 보급선을 정박, 해상 기지로 사용하게 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러한 중국 눈치 보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최초로 열린 아세안 지역 포럼은 스프래틀리 제도 문제를 의제로 다루지 말자는 중국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1995년 중국이 필리핀 해역의 미스치프 산호초를 점령하였을 때 어떤 ASEAN 국가도 여기에 항의하지 않았다. 1995 ~96년 중국이 성명과 군사 시위로 대만을 위협하였을 때 아시아 각국 정부는 하나같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들의 편승 성향은 옥슨버그(Michael Oksenherg)가 적절히 요약하였다.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세력 균형이 중국 우위로 변화할 가능성을 우려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금은 베이징에 대적하려고 하지 않으며 미국의 반중국 십자군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일본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며 일본이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놓고 일본 내부에서 열띤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중국의 군사적,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받는 일종의 주고받기 형태로서 일본이 중국에 순응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인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연합체의 중추로서 미일 동맹에 새로운 의미와 비중을 부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인가? 중국의 침입에 맞서 자국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도록 군사력 증강을 도모해야 할 것인가? 일본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가급적 명확한 답변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노력의 핵심은 미일 군사 동맹일 수밖에 없다. 아마 일본은 동맹의 방향을 이런 식으로 재조정하는 데 마지못해 서서히 동조할 것이다. 일본이 적극성을 가지려면 다음 문제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1)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세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미국의 총체적 능력,

  2)아시아에 계속 주둔하고 중국의 영향력 확대에 적극적으로 맞서겠다는 미국의 의지.

  3)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보거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을 봉쇄할 수 있는 일본과 미국의 능력.


  미국이 확고부동한 의지를 보여 주지 않는 한 일본은 중국에 순응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이 그런 의지를 보일 확률은 낮은 편이다. 동아시아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면서 처참한 결과를 초래한 1930년대와 1940년대를 제외하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자신이 패전국으로 간주한 나라에 결탁함으로써 안보를 지켜 왔다. 1930년대에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 추축국에 가세한 것도 이것을 그 당시 세계 정치에서 가장 역동적인 군사적, 이념적 세력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선 20세기 초반에 일본은 의식적으로 영일 동맹에 합류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세계 문제를 주도하는 나라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일본은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력을 가졌고 일본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었던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중국인처럼 일본인도 국제 정치를 위계 구조로 파악한다. 국내 정치의 역학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 유력한 일본인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일본인이 국제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자국을 고찰할 때 국내 모형은 좋은 발판이 된다. 일본인은 국제 질서를 일본 사회 안에서 내부적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양태에 외부적 표현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 문화적 양태의 특징은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구조와의 유관성이다. 그러한 국제질서관이 형성되기까지는 근대화 이전까지 중일 관계를 통하여 장기간 누적된 일본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결국 일본의 동맹 성향은 '근본적으로 견제가 아닌 편승'이었고 '패권국과의 결탁'이었다. 일본에 오래 거주한 한 서구인은 일본인은 "'대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윤리적 강자로 파악된 존재와 협력하는 데 누구보다도 빠르고 …… 윤리적으로 쇠락하고 기울어가는 패권국으로부터 받은 수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분개를 나타낸다."고 지적하였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이 축소되고 중국의 역할이 급신장하면 일본의 정책도 자연스럽게 변할 것이다. 그런 변화의 조짐은 벌써 감지되고 있다. 중일 관계에서 핵심적인 질문은 '누가 최고인가?' 라고 마부바니는 말한다. 그 답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명시적인 언급이나 공감대의 표명은 없었지만 베이징이 국제적으로 비교적 고립되어 있던 1992년 일본 왕이 중국을 방문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상론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지도자와 국민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기본틀에 매력을 느껴, 압도적인 힘을 가진 미국의 보호 아래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개입이 점차 줄어들면 일본 내에서 '재아시아화' 를 주장하는 세력의 발언권이 강해질 것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다시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가령 1994년의 한 여론 조사에서 21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대하여 일본 국민의 44퍼센트가 중국을, 30퍼센트가 미국을 꼽았으며 16퍼센트만이 일본을 거론하였다. 1995년 일본의 한 고위 관리는 일본이 중국의 부상에 적응할 만한 '자제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이어 미국에게도 그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일본의 자제력에 대한 그의 발언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반면 그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불분명하다.

  중국의 헤게모니 장악은 동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감소시킬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미국과 서구의 영향력도 줄어들 것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주요 지역을 다른 강대국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지배를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헤게모니가 다른 아시아 국가나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수준은 중국의 내부 사정에 좌우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 성장은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낳지만 그와 동시에 정치 발전과 좀 더 개방적이고 다원적이며 나아가서는 민주적 정치 형태를 향한 움직임을 자극할 수도 있다. 한국과 대만에서 좋은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모두 민주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정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권위, 질서, 위계, 개인보다 집단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등 중국의 유교적 전통은 민주화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남부 중국에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된 부, 역동적 부르주아, 정부의 통제 영역을 벗어난 경제력의 누적, 급격히 확대되는 중산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인은 무역, 투자, 교육 등의 방면에서 외부 세계와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 다원주의를 향한 움직임의 기본적 발판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개방이 이루어지려면 권위주의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 세력이 실권을 장악해야 한다. 중국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덩샤오핑 사후의 첫 권력 계승 집단에서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 다음 집단에서는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다. 21세기에 가면 남부 중국에서 명목상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정당의 요소를 정강으로 내걸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중국인과 밀접한 유대를 맺고 이들의 지원을 받는 집단이 출현할지 모른다. 남부 중국에서 그러한 운동이 싹트고 베이징에서 개혁파가 실권을 잡는다면 체제의 성격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올 가능성이 있다 민주화는 정치인들을 민족주의적 구호로 무장시켜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높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에 안정된 다원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다른 강대국들과의 관계도 호전될 것으로 전망된다.

  프리드버그의 지적처럼 유럽의 과거는 어쩌면 아시아의 미래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의 미래는 아시아의 과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시아는 갈등을 감수하면서 견제를 추구할 것인지 패권을 수용하면서 평화를 추구할 것인지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서구 국가들 같으면 갈등과 견제를 추구할 것이다. 역사, 문화, 현실적 세력 판도는 아시아가 평화와 패권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음을 암시한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서구의 중국 침탈과 함께 시작되었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중국이 지역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으면서 동아시아는 자주성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