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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권- 유비의 죽음과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

 

삼국지 9권에서는 주인공 격인 유비가 죽는다.

그의 죽음상황과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남겨둔다.

특히, 한국에서는 조조와는 반대로 오직 좋은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유비에 대해서

연의의 나관중/ 정사를 쓴 진수/  이문열의 평가가 아주 색다르고 흥미로와 기록으로 남긴다.



영안궁으로 가 선주를 본 제갈공명은 선주의 병이 이미
위독함을 알고 황망히 침상 아래 엎드렸다.
  "승상은 침상 곁으로 와 앉으시오."
  선주가 힘을 모아 공명에게 말했다. 공명이 그대로 하자 선주는 손으로 그
등을 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은 승상을 얻어 다행히고 제업을 이룰 수 있었소. 그러하되아는 게 얕고
모자라 승상의 말을 듣지 않다가 그로 인해 이같이 패하였구려. 뉘우침과
한스러움이 병이 되어 이제 이몸이 죽을 날도 멀지 않은 듯하오. 그런데 뒤를
이을 자식이 어리석고 약하니, 어쩔 수 없이 대사를 승상께 당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이다."
  선주는 거기까지 말해 놓고 얼굴 가득 눈물을 흘렸다. 제갈공명 또한 울며
말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용체를 잘 보전 하시어 천하의 바람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옵소서."
  그때 선주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좌우를 흘깃 보더니 마량의 아우 마속을
밖으로 나가게 한뒤 공명에게 물었다.
  "승상께서는 저 마속의 재주를 어떻게 보시오?"
  "저 사람 또한 당세의 영재라 봅니다."
  공명이 평소 믿는 대로 대답했다. 선주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소. 짐이 보기에 마속은 그 말이 실제보다 지나친듯하오. 크게
써서는 안 될 사람이니 승상께서는 마땅히 깊이 살펴 쓰도록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여러 신하들을 모두 방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선주는
여럿 앞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 붓을 들어 유조를 썼다.그리고 그걸 공명에게
건네주면서 탐식하듯 말했다.
  "짐은 글읽기를 즐겨하지는 않았으나 큰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소.성인께서
이르시기를 <새는 죽을 때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말이 착하다.>
했으니 죽음을 앞두고 하는 짐의 말을 가볍게 마시오. 짐은 경과 더불어 역적
조조를 쳐없애고 함께 한실을 떠받치려 했으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헤어지게
되었소. 번거곱게 승상께 태자 선을 당부하는 바이니, 부디 짐의 말을 늘 하는
소리로 여기지 않기 바라오.모든 일을 승상께서 옳게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오."
  공명이 땅에 엎드려 울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잠시 용체를 편히 쉬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은 개나 말의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일해 폐하께서 저희를 알아봐 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주는 내시를 시켜 공명을 일으키게 한뒤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지고
한 손으로는 공명의 손을 잡으며 문득 처량한 소리로 말했다.
  "짐은 이제 죽어가는 몸이니 무얼 꺼리겠소. 가슴속에 묻어 둔 얘기가 있는데
들어 보시겠소?"
  "무슨 가르치심입니까?"
  공명이 슬픈 가운데도 섬뜩함을 느끼며 물었다. 선주가 흐느끼며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승상의 재주는 조비보다 열 배나 나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는
천하의 큰일을 이룩하게 될 것이오. 그때 만약 내 아들이 도와서 될 만한
인물이면 도와주시오. 그러나 그 재주가 모자라 도와도 안될 인물 같으면
그때는 승상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
  실로 엄청난 소리였다. 뒷사람 중에는 유비가 제갈량에게 한 가장 몹쓸
짓으로 이일을 드는 이마저 있다. 공명은 그 말을 듣자 온몸이 짐땀에 젖고
손발이 떨렸다.
  "신이 어찌 감히 신하로서 힘을 다하지 않고 딴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충성과 절개로 죽을 때까지 폐하를 섬기듯 태자를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며 땅에 엎드려 이마를 짓찧었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곤명의
이마에는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다. 선주는 그런 공명을 다시 침상 곁으로
데려다 앉히고 노왕 유영과 양왕 유리를 가까이 불렀다.
  "너희들은 모두 내 말을 머리에 세겨 두어라. 너희 형제 세 사람은 내가
죽거든 여기 이 승상을 아비처럼 모셔라. 조금이라도 게을리하거나 허술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는 두 왕에게 명해 공명에게 절하며 보게 했다. 노왕과 양왕이 나란히
엎드려 절을 올라자 공명이 감격해 흐느꼈다.
  "신이 설령 창자와 골을 땅바닥에 쏟으며 죽게 된다 한들 어찌 이같이 나를
높게 보아준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선명히 대비되는 것은 조조와 유비의 사람쓰는
법이다. 조조는 사마의가 남다른 재주를 지녔음을 알자 낭고-똑바로 앉은 채
고개를 돌려 등뒤를 볼 수 있는 사람-의 상이라 하여
무겁게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마의는 조조가 살아 있을 때는 불우했으나
끝내는 위를 찬탈하고 만다.거기 비해 유비는 오히려 먼저 공명에게 나라를
 내놓음으로써 죽은 뒤까지 공명을 은혜와 의리로 묶어 놓은 것이었다.
선주의 당부는 공명 한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공명의 맹세를
받아낸뒤 다시 여러 신하들을 보고 말했다.
  "짐은 이미 홀로 남게 된 태자는 승상에게 맡겼고, 태자에게는 승상을
아비같이 섬기라 일렀다. 경들도 승상을 섬김에 정성을 다해 짐의 바람을
져버리지 말라."
  그리고 또 조운을 불러 당부했다.
  "짐과 경은 어렵고 험한 가운데도 서로 따르며 오늘에 이르렀으나 뜻밖에도
여기서 헤어지게 되었다. 경은 짐과의 오랜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어리석은
태자를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결코 짐의 말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신이 어찌 개나 말의 수고로움이라도 마다하겠습니다."
  조훈 또한 엎드려 울며 그렇게 다짐했다. 이윽고 선주는 다시 여러
벼슬아치를 돌아보며 마지막 작별을 했다.
  "짐은 경들을 하나하나 불러 말할 겨를리 없다. 부디 스스로를 아껴남은 삶을
값지게 채우라!"
  그리고 마침내 숨이 지니 선주의 나이 예순셋, 때는 장무 3년 4월
스무나흘이었다. 뒷날 두보는 시를 지어 이렇게 노래했다.


  촉주 오를 노려 삼협으로 나갔으나
 또한 같은 해 영안군에서 눈감았네.
 푸른 가리개 빈 산 밖 생각 속에만 떠있고
허무하다 궁궐터, 이름없는 절만 섰구나.
오래된 사당 솔나무 잣나무엔 백로만 깃들었고
 설날 복날에 촌 늙은이나 찾는구나.
 무후의 사당 멀지 않아
 임금과 신하 함께 제사받네.


  그러면 이쯤에서 유비의 삶을 다시 한번 간추려 되돌아보자. 중국 역대
왕조의 창업자 중에서 그만큼 해놓은 일에 비해 민중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명분론에 집착한 연의의 지은이 덕분이라고만 보기에는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 데가 있다. 어떤 이는 그 민중적 인기의 근원을 그의
출신에서 찾는다. 고귀한 혈통이면서 삶의 밑바닥에서 출발하고 있는 그는 그의
대역인 조조와 대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영웅담과 일치한다. 확실히
민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소이다. 또 어떤 이는 그가 이끌었던 집단의
성격을 그 민중적인 인기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도 한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한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해 그가 이끄는 집단이 일찍 관료화한 것과 비교하면
충분히 근거 있는 말이다. 위, 오, 촉 중에서 가장 늦게 관료체제를
정비하는데, 그때까지 유비가 이끄는 집단은 제도나 볍보다는 의리와 인정 같은
임협적 원리에 지배된 사조직에 가까웠다.    수백 년 부패한 한의 관료제에
시달려 온 민중들에게는 호감이 갈 수도 있었으리라. 연의를 지은 이와
마찬가지로, 정통의 문제에서 유리한 유비의 혈통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유비가 조상으로 말하는 경제는 아들이 매우 많아 야심가들이 그 족보에 끼어들
여지가 많다는 말이 있는대로, 유비가 그아들 중에 하나인 중산정왕의
현손이었다는것은 확실히 정통성 문제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도 전한 제실의 가까운 피붙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유비의 통치유형 또는 지배원리일것이다. 중국의
민중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황제의 상은 한고조란 말을 이미 했거니와,
그가 내세운 게 바로 도가의 원리에 따른 무위의 통치였다. 그밖에도 2백 년
이상 존속한 왕조의 창업자는 대개가 도가형의 치자가 많았고,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대부분의 수명  긴 왕조는 도가형의 창업자로 시작해 유가형의
치자로 유지되다 그 유가형의 타락으로 멸망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비에게서 보이는 통치의 원리는 바로 도가형에 가깝다.
 삼국지의 기록 어디에도 유비가 무슨 법률을 반포하고 제도를 정했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있다면 서천으로 들어간 뒤 제갈량의 입안을 받아들인
정도일까. 그 자신이 알고 실천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으나 그가 지향한
것은 틀림없이 무위의 치였고, 그의 사표는 한고조였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그가 자신의 다재다능에 힘입어 유위의 치로 시종한 조조에 비해 훨씬 마음편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그밖에 유비의 민중적 인기를 더한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다. 조조도 사람에 대한 투자는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다른 투자와 병행된 것이었고, 그나마도 법가적 원칙이나
능률의 문제와 부딪치면 서슴없이 사람을 희생시켰다. 유일한 예외가 관운장에
대한 투자 정도 였을까. 그러나 유비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희생시키는 법이
없었고, 그게 그가 이끄는 집단의 결속을 남달리 굳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적 결속은 은연중에 민중들에게도 전해져 그와 그의 집단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정사의 평도 대개 그러하다.
  <선주는 속이 넓고 굳세면서도 남에게 너그럽고 후했다. 사람을 알아보고
선비를 잘 대접해, 한고조의 풍도가 있었으며, 영웅의 기량을 갖추었다....>
  하지만 작은 인정에 이끌리어 큰일을 그르치는 일이 잦았고, 사람을 부리는
기교가 자나쳐 냉정한 관찰자에게는 역겨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형주를
차지하고도 또 서천을 빼앗아 한참 치솟던 기세가 어이없이 꺾이고, 결국 그의
촉이 3국 중에서 가장 허약한 나라로 주저앉고 만 것은 그런 결점들의 결과가
아니었는지. 거기다가 유비의 과거지향적이고 보수적인 정치이념은 근대적
이념에 물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못마땅한 데마저 있다. 그게 갈수록 조조를
격상시키고 그에게는 과대평가의 혐의를 걸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선주 유비가
숨을 거두자 문무의 모든 벼슬아치들은 하나같이 슬퍼해 마지않았다.    
공명은 여러 벼슬아치들을 이끌고 선주의 유해를 받들어 성도로 돌아갔다. 태자
유선은 성밖까지 나와 선주의 영구를 맞아들이고 정전에 안치했다. 슬픔을 다해
장례를 치르고 선주가 죽으면서 남긴 조서를 받들어 읽으니 그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짐이 처음 얻은 병은 다만 하리일 뿐이었으나 뒤에 다시 여러가지 병이
보태어 끝내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듣건대 사람이 쉰까지 살면 결코 일찍
죽은 것이라 할 수 없다 했거니와 이제 짐의 나이 예순하고도 몇을 더했으니
여기서 죽은 들 다시 한스러울게 무엇이랴. 다만 너희 형제는 힘쓰고 또힘쓰라.
악한 일은 작다고 해서 하는 법이 없게 하고, 착한 일은 작다고 해서 하지 않는
법이 없게 하라. 오직 어질고 오직 덕이 있어야만 남이 너희를 따르게 할 수
있으 리라. 너희들의 아비는 덕이 없는 사람이라 본받을 게 못 되니 내가
죽거든 너희는 모든 일을 승상과 함께 돌보되, 그분을 모시기를 이 아비 섬기듯
하라. 결코 게을리해서 아니되고 잊어서는 더욱 아니 된다. 당부하고
당부하거니와, 무엇이든 먼저 승상께 물은 뒤에 행하라.>
  태자가 모든 신하들 앞에서 유조를 읽기를 마치자 공명이 나와서 말했다.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 태자께서는 어서 제위로
나가시어 한의 대통을 잇도록 하십시오."그리고는 태자 유선을 받들어 제위에 올리니 이가 촉의 후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