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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8권- 관우, 조조, 장비의 죽음과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

 

 

삼국지 8권에서는 주인공 격인 관우/ 조조 / 장비가 차례로 죽는다.

그들의 죽음상황과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남겨둔다.

특히, 한국에서는 보통 간웅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조조에 대해서

연의의 나관중/ 정사를 쓴 진수/  이문열의 평가가 아주 색다르고 흥미로와 기록으로 남긴다.

(관우의 죽음과 평가)

 날이 훤히 밝았을 때는 관공 부자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손권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손권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문무의 관원들을 자기 장막에 불러모아
놓고 관공이 끌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래잖아 마충이 졸개들과 함께 에워싸듯 관공을 끌고 손권 앞에 나타났다.
지난날 관공으로부터 당한 여러 차례의 수모를 생각하면 그가 밉살스럽지 않을
까닭이 없었으나 손권은 짐짓 목소리를 부드럽게하여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장군의 덕을 사모하여 옛적 진과 진이 그러했듯 서로
화친하려 했는데 장군은 무슨 까닭으로 마다하셨소? 장군은 또 지난날 스스로
천하에 맞설 사람이 없다고 여기신다 했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이몸에게
사로잡힌 바 되셨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이 손권에게로 돌아와
일해 볼 생각은 없으시오?"
  미움보다는 인물에 대한 욕심을 앞세우는 게 과연 천하의 셋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주군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짓밟힌 자부심 때문에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는 관공에게는 그게 꼭 야유처럼 들렸다. 관공이 문득
수염을 부르르 떨며 소리 높이 꾸짖었다.
  "닥쳐라! 이 눈알 푸른 어린 놈, 수염 붉은 쥐새끼야. 나와 유황숙은 일찍이
복사꽃 핀 동산에서 의를 맺고 한실을 되일으키려 맹세했다. 어찌 너같이 한을
저버린 역적놈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이제 잘못하여 네놈들의
간사한 꾀에 빠졌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여러 소리 할 게 무에
있느냐?"
  그래도 손권은 그런 관공을 탓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체 제 사람들 쪽을
돌아보며 슬며시 물었다.
  "운장은 세상이 다 아는 호걸로 나는 그를 매우 아껴 왔소. 이번에 두터운
예로 대접해 그에게 항복을 권해 보고 싶은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자 주부 좌함이 일어나 말했다.
  "아니됩니다. 지난날 조조가 저 사람을 얻었을 때 조조는 저 사람을 후에
봉하고 <사흘에 작은 잔치, 닷새에는 큰 잔치>를 열어 그 마음을 사려
했습니다.
말에 오르면 금을 걸어 주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걸어 줄 만큼 은혜를 베풀고
예를 다했으나 끝내는 저 사람을 붙들어 둘 수 없었지요. 오히려 관을 지키는
장수를 여럿 죽이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도읍을
옮겨서라도 저 사람의 칼끝을 피하려 했을 만큼 조조를 몰아댔던 것입니다.
  주공께서 이왕에 저 사람을 사로잡으셨으니 어서 죽여 뒷날의 걱정거리나
없애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저 사람 때문에 조조 같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손권도 갑자기 떨떠름해졌다. 한동안을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운장 부자를 끌어내 목베어라."
  이에 관공과 관평은 모두 끌려나가 목숨을 잃으니 때는 건안 24년 시월이요,
그때 관공의 나이는 쉰여덟이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를 노래 했다.


  한말의 인재들 짝할 시대 없는데
  그중에서도 운장이 홀로 뛰어났구나
  신 같은 위엄 무를 떨쳤고
  선비 같은 고아함 글도 알았다.

  하늘의 해 같은 마음 맑기 거울이었고
  춘추로 다진 의기 불의의 구름을 걷어냈네
  밝구나, 만고에 드리운 그 이름이여
  삼분천하 때에만 그치지 않네.

  달리는 또 이런 시가 있다.

  인걸 좇아 옛 해량땅에 이르니
  사람들이 다투어 운자에게 절하네
  도원의 하루로 형제 된 이들
  이제는 천자와 왕으로 천 년을 제사받고 있구나.

  기개는 바람과 우레를 깐 듯 당할 이 없고
  뜻은 해와 달처럼 빛을 뿜네
  모시는 사당 지금도 천하에 널렸건만
  고목의 겨울 갈가마귀 지는 해에 비끼기 몇몇 해더냐.


  옛사람의 감회가 그러하나 이젯사람으로서의 평도 없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세 번이나 책을 던졌다가 다시 집어들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바로 관공이 죽었을 때요 두 번째는 유현덕이 죽었을 때이며, 마지막은
제갈공명이 죽었을 때라고 한다. 적어도 연의에서는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은연중에 우리 몸에 밴 실증사학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작가의
주관으로 재구성된 연의라 할지라도 유비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 가치 독점이
지나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알려지기로 유비를 중심한 집단은 그
전성기에조차도 영토, 국부, 민수에 있어서 대략 위의 사분의 일, 오의 절반
남짓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유비가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경제는 한의 황제 중에서 아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이 가운데 하나여서 핏줄에서 정통성을 얻어내려는 야심가들이
끼여들기 좋은 족보에 속했고, 유비가 지향한 것도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에의
부응이 아니라 낡은 세계의 유지 또는 보강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서 정사를 쓴 진수 같은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연의나 평화를 쓰는
이들까지도 조조를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고 싶은 유혹에 종종 빠져들었다.
특히 그런 현상은 근세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져 예컨대 중국의 곽말약 같은 이는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로 내세운 반면, 유비를 보수 반동 집단이 우두머리로
깎아내리기까지 했고, 가깝게는 연전 일본의 작가 진순신도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연의를 구성한 적이 있다.
  이 평역 삼국지도 처음 구상 될 때는 거의 그러했다. 그러나 자료수집차
대만에 가서 얼마 머무는 동안 그런 첫 번째 구상은 중대한 수정을 받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만의
이름만 소장 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오홍일 교수의 충고였다.
  "조조를 어느 정도 복권시키는데는 반대 않지만 촉한정통론과 관공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걸 건드리면 그 작품은 연의 삼국지 아닌 다른 어떤
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의 충고가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흘려들을 수 없는 데가 있었다.
  조조의 복권문제나 촉한정통론은 다음으로 미뤄 두고 우선 여기서는 관공의
얘기만 하기로 하자. 상당히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국인도 관공을 말할 때는
우리처럼 관우나 관운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관공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다.
또 관공은 뒷날로 갈수록 높여져 관왕에서 관성대제로, 그리고 마침내는
신으로까지 널리 추앙받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하였을까.
  관공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적어도 그리 대단하지
못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는 해량 땅의 한낱 무부로서 젊어서 사람을 죽이고
탁현으로 피해와 살았다는 게 남겨진 기록의 전부인데, 어떤 이는 이런 추측을
하기도 한다.
  곧 해량 땅은 이름난 소금 산지로 그 소금 밀매꾼-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들의 뒤를 봐주다가 죄를 짓게 되어 멀리 탁현으로 달아났던
것이라고.
  종종 관공은 학문의 사람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무인인 그의 위엄에 빛을
더해 주고 있으나 그 또한 대단한 것은 못 되었다.
  당시의 흔한 무장들보다는 좀 나았다는 정도로 춘추와 얼마간의 병가서를
읽었을 뿐이었다. 다만 춘추는 깊이 공부해 줄 줄 욀 정도였으며 지금도 그의
초상을 보면 대개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은 바로 춘추하고 한다.
  그의 절묘한 무예와 전략도 많은 부분은 뒷사람들의 윤색이라고 한다. 안량과
문추를 죽여 그의 무예는 거의 신비한 경지까지 끌어올려졌으나, 여포, 방덕,
서황 등과의 싸움을 종합해 보면 의심이 가는 데가 많다.
  또 전략에 있어서도 그가 무성으로 기림받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번성 공략작전의 무리만으로도 의심을 받기에 넉넉하다.
  관공의 덕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미방과 부사인의 배반, 맹달과 유봉의 외면 같은 사건만으로도 그의 인간관계가
그리 원활하지 못했음은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최후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은 바로 거느리고 있던 장졸들의 이탈이었다.
  모두가 여몽의 교묘한 심리전 탓이라고는 하지만, 심리전이라는게 원래가
덕장을 중심으로 뭉쳐진 군사들에게는 통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그렇다면 관공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이 보여준 어떤 이념미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어떤 것인지를 추적하기
위해 진수의 평부터 음미해 보자. 진수는 관공의 열전 뒤에 이런 짤막한 평을
덧붙여 놓고 있다.
  <관우는 -장비와 더불어)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일컬어졌으며 세상에서는 범
같은 신하로 알려졌다. 관우는 조공의 은덕에 보답하여 -의로 엄안을 놓아준
장비와 더불어) 국사의 풍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관우는 성정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기는 데가 있었다>
  인간의 훼예표폄은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진수는 짧은 평
속에서나마 관공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질을 모두 집어내고 있다. 곧 조조에
대한 보은으로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의기를, 그리고 성격을 통해서는 또한
일생의 짐이 된 자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연의에서 관공에게
쏟아진 지은이의 노력과 열정은 거의 모두가 바로 두 가지를 하나의 대중적인
이념미로 형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널리 인정되고 있는 대로 관공을 일생동안 이끈 의기의 원천은 춘추였다.
공자의 개념이 투영된 그 역사책은 죄를 짓고 숨어 다니는 한 젊은 무부를
매혹시킴으로서 이윽고는 중국 민중의 가슴 속에까지 세월이 가도 바래지 않는
이념미의 한 원형을 제공한 셈이었다. 사실 관우의 삶을 살피면 가장 빛나는
부분은 오관참장처럼 의와 연관을 맺는 부분이다.
  때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충성의 형태로, 때에 따라서는 협객 사회의 의리로,
그리고 더러는 신용 있는 채무관계나 분명한 은원으로 나타나는 관공의 의는
본질적으로 소박한 보수주의에 뿌리하고 있다.
  더 큰 정의에서 보면 후한의 사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이미 충성의 근거를
상실했지만  전부터 충성해 왔으니 충성을 계속 바쳐야 했다. 그 선악을
삼았으니 끝까지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관공에게는 변혁의 필요성이나 민중의 개념은 거의 고려 밖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변혁을 갈망하고 기대심리에 빠져 있는 그 민중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민중의 움직임에 민감했고 어느 정도는 혁명의식에 유사한 정신과 실천력까지
보인 조조가 갈수록 격하되어, 명대의 어떤 경극 배우는 조조역을 하다가 성난
관중에게 맞아 죽었을 정도가 된 것과 더불어 뒷사람에게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현상이다.
  한 할 일없는 문사의 터무니없는 추측일는지 모르긴 하되, 혹 그것은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중국 민중들의 본능 속에 거듭 쌓여 온 변혁에 대한 불신과
경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보다 거창하고 본질적인 의를 내세우고, 달콤한
실리로 그들을 앞 뒤 없이 꾀어댔던 그 수많은 역사의 새아침들이 기껏 나라의
이름과 제실의 성씨가 바뀐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때의 실망과 분노가 핏줄을
따라 대대로 전해 진 게 아니었을까.
  진수는 관공을 폄하는 뜻으로 그걸 집어냈지만 관공의 끝 모르는 자부심도
관공의 삶과 인격에 민중적인 매력을 더해 주었음에 분명하다. 벌거숭이 힘의
지배를 받는 난세일수록 자부심 같은 고급한 정신의 사치는 지켜내기 어렵다.
  그때그때 강자를 만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민중들에게는
관공의 그 터무니없는 자부심이 차라리 시원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
조조와 손권 같은 인물들에게까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내뱉는 관공의 자부심은 그대로 아름다움이요 신비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조조의 죽음과 그에대한 평가)

조조는 다시 조홍, 진군, 가후, 사마의 등을 불러오게 했다.
그들이 모두 조조가 누운 침상 앞에 이르자 조조는 힘없이 뒷일을 부탁했다.
"대왕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며칠 되지 않아 깨끗이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말을 받아 주지 않았다.각오가 선 사람처럼 죽을 채비에 들어갔다.
  "내가 천하를 종횡하기 30여 년 그 동안 뭇 영웅들이 일어났으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다만 강동의 손권과 서촉의 유비가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병이 무거워 그대들과 다시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틈이 없을 것
같다. 특히 그대들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니 부디 이대로 이루어 지게 되기를
빈다. 나의 맏아들 앙은 유씨의 소생이나 불행히도 일찍이 완성의 싸움에서
죽었다. 따라서 이제 내 아들은 변씨 몸에서 난 비와 창과 식과 웅 넷뿐이다.
내가 평생 사랑했던 것은 셋째 식이었으나, 사람됨이 겉으로만 화려하고
성실함이 적으며 술을 즐기고 몸가짐을 함부로 해 세자로 세우지 않았다. 둘째
창은 용맹스러우나 꾀가 모자라고 넷째 웅은 병치레가 잦아 제 한몸 보살피기도
바쁘다. 이에 비해 맏이 비만은 돈독함과 두터움을 갖추고 공손하며 삼갈 줄
아니 내 뒤를 이어갈 만하다. 그대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마땅히 그를 도와 큰
일을 이루게 하라."
  바로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조홍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마침내 울며 조조 앞을 물러났다.
  조조는 또 근시를 시켜 모아 두었던 명향을 모두 가져오게하여 자신을 섬기던
여인들에게 나눠주며 당부했다.
  "내가 죽은 뒤에 너희들은 부지런히 여공을 익히도록 하라. 길쌈을 많이 하고
그 실로 신을 삼아 팔면 너희들이 쓸 돈은 너희가 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두 동작대에 모여 살며 매일 제사를 올리되 반드시
기생들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하며 상식을 올리라 했다.
  그밖에 조조는 또 창덕부에 명하여 강무성밖에   거짓 무덤 일흔두 개를
만들게 했다. 뒷사람들에게 자신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하여 파헤쳐짐을
피하려 함이었다.
  모든 당부가 끝난 뒤 조조는 한소리 긴 탄식과 함께 눈물을 주르르 쏟더니
문득 숨이 끊어졌다. 그의 나이 예순여섯, 때는 건안 25년 정월이었다.
  뒷사람이 업중가란 노래 한 편을 지어 조조의 삶을 읊었다.


  업군 업성에 물은 장수라.
  이 땅에 맞춰 이인이 일어났네.
  큰 꾀 멋있는 일 모두 글하는 마음에서 나왔고,
  임금과 신하, 형과 아우, 아비와 자식같이 지냈다.
  영웅은 속된 가슴으로 헤아릴 수 없고
  그 들고 남 또한 여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
  공 으뜸 죄 으뜸 두 사람 아니고
  더러운 이름 향기로운 이름 모두 한몸에 붙었네
  빼어난 글 드높은 패기
  어찌 여느 무리와 함께 될 수 있으리.
  창을 뉘어 놓고 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었으되
  힘과 운세 따라 머리 숙이고 쳐들 줄도 알았다.
  이런 사람이 어찌 역적질인들 못할까
  작으면 패자요, 크면 왕 아닌가
  패자며 왕 노릇 아녀자를 울리는 법
  불평해 본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네
  도사 불러 목숨 비는 일 이롭지 못함 잘 알았고
  아낙들 불러 향 나눠주니 정 없는 사람도 아니네
  오호라
  옛사람 하는 일 크고 작음 가림이 없구나
  적막하든 호화롭든 다 뜻이 있어 한 일
  서생들아, 가볍게 무덤 속 사람을 논하지 마라
  무덤 속 사람이 되려 그대들 되잖은 서생티를 비웃으리라.


  연의를 지은 이는 조조에게 지나치게 엄격했으나 그의 삶을 이 업중가로
마무리한 일만은 예외일 것 같다. 조조의 삶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요약한 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하면 진수의 평은 아무래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듯하다. 진수는
무제기 끝에서 조조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한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군웅이 잇따라 일어났으되 그 중에서도 특히
원소는 범같이 천하를 넘보는 게 누구도 맞설 자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태조는
슬기와 지모를 다하여 마침내 천하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신불해, 상앙의
법술을 꿰뚫었고, 한신, 백기의 기이한 계책을 갖추었다. 인재를 거두어 쓰되
모두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정보다는 능력을 먼저 헤아렸고, 쓸
때는 지난 허물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황실의 기틀을 잡고
큰일을 이루어냈으니 그 밝은 지략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할만하다. 그저 여느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를 넘어 초세지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진시대의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조조를 좋게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 그의 평은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나
조조에게는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쳤다는 소리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1천7백 년의 세월과 정사보다는
야사, 전설, 무명씨의 잡저에 의지해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한 번쯤은 그의
삶을 종합적으로 음미해 보는 것도 뜻이 있늘 줄 믿는다.
  먼저 한 정치가로서의 조조를 살펴보자. 흔히 조조의 권세를 표현할
때<협천자 영제후>란 구절을 쓴다. 곧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다는 뜻인데,
이는 조조가 권력과 정통성의 연관을 그만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도
된다.
  오랜 세월 실권을 잡고 있었으면서도 조조는 단 한 가지 자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제외하고는 제실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법이 없었고, 또 부득이
해 손을 대도 끝내 천자를 해치지는 않았다. 자신을 겨냥한 서너 차례의 암살
음모가 모두 외척을 통해 현제와 이어져 있었건만, 연의에서조차 조조가 직접
헌제를 핍박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아서는 대단한 너그러움 같으나 실은 그만큼 정통성이 가지는 힘을
의식했다는 편이 옳다. 그가 몇십 년을 더 살았다 해도 반드시 제위까지
찬탈했을까는 단언하지 어려울 것이다.
  조조는 또 백성들의 움직임이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민감했다. 그런점에서
조조를 민중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그의 의식이 과연 그렇게 규정지을
정도까지 갔는지는 의심스럽다.
  그가 민중을 위했다면, 그것은 힘의 논리에 따른 한 방편으로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말의 부패한 제도와 혼란된 사회상황으로 보면
그만큼이라도 나아간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래도 조세와 부역일 것이다.
  그런데 조조를 헐뜯어 말하는 사람도 그가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었다가거나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무리하게 백성을 몰아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든지 곡식을 풀어 백성을
먹였다는 기록뿐이다.
  거기다가 조조는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한 사람이었다.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조조는 영을 내려 자신을 위해 죽은 장병들의 가족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또 둔전법의 도입도 아마 조조가 가장 먼저일 것이다. 원래
호족들의 제도인 그 방식을 빌려 조조는 많은 군사를 먹여야 하는 부담을
백성들에게 덜어 주었다.
  조조의 인재를 등용하는 법도 뒷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조조는 오직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쓰되, 한 번 쓰면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았다. 힘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 같은 난세의 지식인들을 자신의 손발로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가 그 시대의 가장 많은 재사를
거느리도록 해주었다.
  뒷날 제갈량은 자신이 촉한의 승상이 된 뒤에도 아직까지 위에서 주부니
사마니 하는 대단찮은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학의 수재들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탄식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아직도 그런 하찮은 벼슬자리에 있다니 도대체 위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단 말인가."
  외교나 동맹관계에 대해서도 조조의 신축성은 놀랍다. 어제의 원수라도
실익만 있다면 가장 가까운 벗이 되고 어제까지의 벗이라도 이해에 거슬리면
칼끝을 들이댔다.
  비정한 힘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원리라고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대로
실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수를 잊는 데는 너그러움과 참을성이 필요하고
벗을 버리는 데는 그 나름의 용기와 과단성이 필요하지 때문이다. 범인들의
경우에는 용케 원수를 잊기는 해도 벗을 버리지 못하거나, 벗은 어떻게
저버렸지만 지난날의 원수를 잊지 못해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거기다가 그나마 대단치도 못한 의리나 편협한 원한에 사로잡혀 어물거리다가
시기를 놓치기까지 한다. 정치와 윤리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또는
정치에서의 윤리란 개념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따라 사뭇 달라지겠지만,
벌거숭이 힘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난세의 정치가인 조조에게는 그런 신축성도
무시 못할 강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조조의 강점은 수없이 많아 그것만으로 따로 책 한 권을 묶을
만하다. 한마디로 말해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로서는 거의 완벽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혹 어떤 이는 사상성 또는 이상주의의 결여를 말하기도 하나
그것도 온당한 지적은 못 된다. 그 바탕이 되는 학문적인 소양이나 풍류적
기질에 있어도 조조는 어김없이 당대의 군웅들 중 으뜸이었다.
  다음은 군략가로서의 조조를 살펴보자. 왕침이란 사람은 조조의 용병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조가 군사를 부리는 법은 대개 손, 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조조는
거기다 기책과 허허실실을 조화시켜 그 천변 만화의 전략이 귀신 같았다.
스스로 병서를 지어 해석을 달아 장수들에게 나눠주니 장수들은 거기 따라 싸워
매번 이겼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는 조조가 군사를 부리는 요체를 허허실실로 보고 있으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임기응변의 재능인 것 같다. 조조는 아무리 큰 싸움이라도
사전에 윤곽을 결정하는 법이 없었다. 질풍같이 군사를 몰고 가서 부딪치고,
부딪치면서 그 국면 국면마다 거기에 알맞은 계책을 썼다.
  특히 그는 승기를 잡는 데 누구보다 재빨랐고 패배의 조짐에도 예민했다. 그
바람에 그의 승리는 언제나 기발해서 화려해 보였고, 패배의 상처는 최소한에
머물렀다. 연의를 보면 곳곳에서 조조의 참담한 패배가 나온다. 그러나 그
패전으로 물러앉는 법은 없었고, 뒤따른 반격으로 싸움은 항상 뒤집어지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 패배가 조조에게 준 충격이 그만큼 적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조조의 패배가 참담하게 보이는 것은 다만 그가 언제나 제일선에
있었던 것과 연의를 지은 이의 악의가 교묘하게 엮어진 탓일 뿐이다.
  그 다음 병략가로소의 조조가 보여주는 특징은 소규모 전투에서 유달리
강했다는 점이다. 조조가 몸소 진두에 나서면서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한 것은
관도의 싸움 때와 적벽의 싸움 때일 것이다.
  관도에서 원소와 싸울 때도 조조는 소규모의 전투에서는 거듭 이기고 있으나
대국적으로는 밀리다가, 창청에서 배수의 진세를 이루게 됨으로써 극적으로
원소를 격파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적벽의 싸움은 여지없는 참패로 끝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적벽싸움의 패인에 대해서는 달리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조조의
군사를 머릿수는 많아도 정예하지 못했고, 강을 끼고 싸우는 데도 수전에
익숙지 못했으며, 군사들 사이에 병이 돌아 싸우기도 전에 전력이 크게 줄어
있었고, 형주 수군은 조조에게 항복한 지 오래잖아 충성심마저 없었다.
  거기다가 조조를 맞아 싸운 상대는 제갈량, 방통, 주유, 노숙 등 당대 제일의
병법가들이 연합한 세력이 아닌가- 라는 반문이 그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대규모 동원에서 한 번은 아슬아슬한 역전을 하고, 한 번은 그대로 참패해
버렸다는 결과는 아무래도 조조의 용병술 그 자체와 무슨 연관이 있는 듯하다.
  조조 최후의 대규모 동원이라 볼 수도 있는 한중 출병도 하후연의 원수를
갚기는커녕 끝내는 한중을 유비에게 내주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 전투에 강했다는 특징이 군략가로서의 조조를 과소평가 할
이유는 못 된다. 큰 싸움도 결국은 작은 싸움들의 모임이며, 더구나 소규모
전투도 조조를 중심으로 본 것이지 상대까지 소규모라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조조는 작은 군사로 그 몇 배나 되는 적의 대군을 수없이 깨뜨려
보였다. 병법의 원리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고 약한 것으로 강함을 이기는
데에 있다면 조조는 3국을 통틀어 으뜸가는 군략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밖에   조조의 군사적인 성공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랑캐의 정벌이다.
연의는 원소 토벌의 한 결과로 가볍게 다루고 있으나 특히 오환을 쳐부순 것은
좀 부풀리어 말한다면 한무제의 흉노 토벌에 견줄 만하다. 오환은 한때 요동,
요서, 우북 3군을 차지하고 유주의 태반을 다스릴 만큼 강성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추장을 죽이고 20만을 사로잡음으로써 동북을
평정했다. 또 강족도 동탁, 마등, 마초 등 지방 군벌과 야합하여 북방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조조에 의해 조용해졌다. 어떤 이는 조조의 그 같은 토벌이
없었던들 오호 십육국 시대가 훨씬 빨리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중국사의 한 이변이라 할 만큼 인재가 쏟아진 시대여서 혼일사해의 위업은
이루지 못했으나 조조의 군사적 재능은 분명 뛰어났다. 당대뿐만 아니라 25사
전체로 보아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군략가였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면- 문장가로서의 조조를 살펴보자.
원래 조조의 문집은 위무제집이라하여 2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고-거기에는 뒷사람의 왜곡으로
조조가 갈수록 인기를 잃어 버린 탓도 있었다.) 지금 남은 것은 30여 편의 시와
백여 편의 문장-주로 영이나 포고의 형태)뿐이다.
  시는 대개 악부인데, 실은 조조가 바로 민간의 소박한 노래이던 고악부를
악부시란 형태도 정통문학에 편입시키는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시인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적벽싸움을 앞두고 불렀다는 단가행을 소개할 때 이미
말했거니와 조조의 시풍은 한마디로 통탈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거리낌없고
숨김없이 감정을 토로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하찮은 신분에서 정상의
위치에까지 오른 조조 자신의 기개와도 연관이 있는 성싶다.
  지금 전하고 있는 조조의 시는 <단가행>외에 <도관산> <대주> <호리행>
<극동서문행> <고한행> <보출하문행> <맥상상> <정렬> <추호행> 등이 있다.
앞서 몇 편 보았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극동서문행>을 보기로 한다.


  새북에서 날아오른 기러기
  아무도 없는 이 땅으로 왔구나
  날개 저어 만리 길
  가나 서나 절로 줄을 짓네
  겨울에는 남쪽의 벼를 먹고
  봄이 오면 북쪽으로 되날아간다
  밭 속을 구르는 다북쑥
  바람에 쓸리어 멀리 날아오르네
  뿌리에서 잘린 지 이미 오래거니
  세월이 지난다손 다시 만날까
  싸움터에 나온 이 몸 또한 그러하구나
  어찌하여 이곳 저곳 헤매는가
  말은 안장 풀릴 틈이 없고
  나는 갑옷 투구 벗을 겨를이 없네
  늙음은 시름시름 찾아들건만
  언제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나.
  신룡은 깊은 못에 몸을 감추고
  사나운 범은 높은 언덕을 걷는다.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언덕으로 머리 두거니
  이 몸인들 어찌 고향을 잊을 것인가.


  조조의 문장은 <구현령> <명본지령> 등의 포고령과 상소문, 표문 등이 남아
있는데, 대개는 일부만 전하거나 요약된 형태이다. 그러나 그의 호방함이나
조리를 엿보기에는 넉넉하여 그를 문장가로 불러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명본지령 또는 술지령이라 불리는 긴 포고령은 문장이 뛰어날 뿐 아니라
그의 삶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조의 그러한 문학적 재능은 그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충이란 막내는 어려서
죽어 일화밖에 전해지지 않으나, 맏아들 비는 위문제집 23권을 남겨 그 일부가
전하고, 셋째 식은 저 유명한 칠애시와 낙신부를 남겨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조식은 시품을 지은 종영으로부터 당대 제일의
문장가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다.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그들의 재능은 그
아버지인 조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조조는 그가 남긴
글만으로도 그에게 덮씌워진 역사의 악역을 벗어던질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이
그저 한 비유거나 문사를 향한 당부일 뿐이고, 특히 조조에게는 글이 다만
자신의 잘못과 거짓됨을 감추거나 치장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말과 글의 죄 많음에 섬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로서 군략가로서, 그리고 문장가로서 그처럼 뛰어난 조조가
오늘날 민간의 의식 속에서 간웅으로만 남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더 자주
있었던 볼 만한 시책이나 미덕보다는 드물었던 실책이나 악덕이 그에 대한
기억의 전면에 나서고, 화려한 승리보다는 참담한 패배가 훨씬 그답게
여져지며, 풍부한 인간성과 학문적, 예술적 소양대신 비정과 잔혹, 간교함만이
그의 정신적 초상으로 남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조조를 그렇게 몰아간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것은 연의를 지은
나관중의 사관일 것이다. 나관중은 명의 건국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사람으로
이민족의 왕조인 원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한민족의 정통사관을 정립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그 지나친 적용은 혈통을 근거로 유비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번 유비를 정통으로 내세우자 조조에게는 그 대역이 절로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손권이 있었지만 그는 수성의 인간형- 소설적으로도
매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유비를 높이는 악역을 맡기에는 조조보다 무게가
모자랐다. 거기다가 성격의 극명한 대비를 중요한 요소로 삼는 장회소설의
특질은 조조를 더욱 왜곡시켜 지금처럼 인상지어지도록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어떤 인물을 깎아내리려 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감정적인 호응이 없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관중의
연의가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것은 대중의 감정과 그의 관점이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조조는 이미 연의 이전에도 악역을 맡아
왔을 것이다. 실제로 나관중의 연의전에 나온 평화니 평설식의 삼국지나 민간의
전설도 조조에게 그리 우호적이 못 되었다.
  그렇다면 출신에서도 자기들과 멀지 않았고, 세력에서는 천하의 태반을 잡고
있었으며, 다스림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베푼 조조에게 대중들이 반감을 가진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제 와서 그 까닭을 더듬는 것은 자칫 터무니없는 공론이 될지 모르지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치자의 인간형에 대한 중국인들의 기호다. 그들이
이상형으로 보는 군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은 한고조 유방인데 그의 능력은
한마디로 <무의의 능>이라 할수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특별히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었다. 학문을 깊이 하지도 않았고, 예술적인 소양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번득이는 재치가 있던 것도, 도덕적인 절제가 남달리
철저하지도 않았다. 그의 강점은 단 하나 사람들을 잘 부리는 것뿐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에 비해 조조는 정반대편에 선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조조는 그 한몸에
너무 많은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다스림을 받는 쪽에서 보면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는 곧 존경은 받아도 사랑을
받기는 어려운, 정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그런 부류의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게 그가 세운 왕조의 단명했음과 아울러 단순한 불만 이상의 반감으로
변질되어 간 것이나 아니었을는지.
  그 다음으로 조조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지 못한 데는 목적이 따로 있는
정의와 선에 대한 불신도 한몫 한 듯싶다. 그는 말끝마다 국가와 백성들을
앞세웠지만 그가 품고 있었던 원대한 야심은 일찍부터 그의 적들 때문에 대중의
의심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그 자신은 죽을 때까지 끝내 한에 대한 충의를
지켰으나, 그 아들 조비의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제위를 찬탈함으로써, 일생에
걸친 그의 노력은 결국 충의가 아니라 자제 또는 원대한 계략으로 단정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밖에 조조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의 원인으로 추측되는 것으로는 비범한
인간에 대한 범인들의 시기이다. 조조가 가진 재능들 가운데 하나만 가져도 그
분야에서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범인들에게는 그가 부럽다 못해
밉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모든 감정의 바탕에다 구체적이고도 명백한 조조 개인의
악행이 겹치면 대중적인 인기와는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조조의 개인적인 악행은 과장의 혐의는 가지만 연의 구석구석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섬뜩한 것은 사람의 목숨을 너무 쉽게, 그리고 함부로
수단삼아 이용하는 점이다.
  원소와 싸울 때 모자라는 군량 때문에 생긴 불만을 군량관에게 뒤집어쒸워
죽인 일이나, 암살의 방지를 위해 꿈결을 가장해 근시를 베어 죽이 일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연의에는 용케 빠져 있지만 또 이런 일도 있다.
  조조는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누가 칼을 감추고 내 곁으로 다가오면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아 조조는 다시 꾀를 내었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무사 하나를 불러 가만히 말했다.
  "너는 여럿이 모였을 때 칼을 품고 내게;로 다가오너라. 그러면 내가 가슴이
뛴다며 너를 잡아 문초하게 할 것이다. 그때 너는 겁내지 말고 나를 죽이려
했다고 실토하여라. 네 목숨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높은 벼슬을 주고 네
가족들에게도 후한 재물을 내리겠다."
  그 말을 믿은 그 불쌍한 무사는 조조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나 조조는
그의 실토가 있기 무섭게 그를 끌어내 목베게 했다. 끌려나가면서도 조조가
어떻게 해주겠거니 믿었던 그 무사는 결국 칼이 목에 떨어 지고서야 속은 줄
알았으나 속절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조조의 그 신통한 능력에 감탄했고,
소문이 나자 속으로 은근히 조조를 엿보던 사람들도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으로도 조조가 시대를 바꾸어 가며 역사의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이유로는 모자란다.
  누군가 영향력 있는 계층의 끊임없는 상기와 첨가가 없이는 그의 비하가
그토록 확대되고 영속적으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삼국지
연의가 누리는 지속적인 인기와도 연관이 있을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 가지
두드러진 조조의 실책을 찾아볼 수 있다.
  어찌된 셈인지 조조는 <신상필벌>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무장들에게는
관대했던 반면 문신들의 실수에는 가혹했다. 삼국지 전편을 통틀어 조조가
무장을 패전이나 그 밖의 책임을 물어 처형한 예는 거의 없고, 어쩌다 있어도
이름 없는 장수거나 처음부터 탐탁잖게 여겼던 항장의 경우뿐이다.
  그러나 문신에 이르면, 조조는 당대 제일급의 학자나 문사를 가리지 않고
가차없이 처형하고 있다. 첫째가 공용, 공자의 20대 손이요, 건안 칠자의 한
사람으로 당대 문단의 기린아였다. 그러나 조조는 대단찮은 말 몇 마디를
빌미로 일가를 몰살시키고 만다. 그 다음이 예형, 역시 당대의 이름난
재사였으나 황조의 칼을 빌려 죽인다.
  다시 당대의 문장 양수, 남의 집안 상속싸움에 끼여든 흠은 있으나 역시 말
몇 마디의 죄로 죽여 없애기에는 아까운 재주였다. 또 최염이 있다. 그도
학덕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나 몇 구절 글귀 때문에 조조에게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순욱, 순유 숙질도 일생을 조조를 위해 힘을 다했지만 한 번
노여움을 사자 죽음으로 겨우 용서받았다. 학자나 문사로는 그리 높이 치는
축에 들지는 못해도, 조조가 문신의 실수에 가혹했다는 예는 될 수 있으리라.
  역사가 폭군으로 기록하는 제왕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는 학자나 문사를
박해하는 짓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진시황으로 그는 여러 가지로 뛰어난
군주였으나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그 빛나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폭군으로
더 잘 알려졌다.
  써서 남기는 이들을 해친 데 대한 당연한 보복인 셈이나 당하는 쪽으로 보면
꽤나 억울한 것이다.
  조조의 경우도 혹 그런 탓은 아니었을까, 뒷날 써서 남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의 동료의식이 한방향으로 모아져서 조조를 격하시키고 마침내는
역사극의 고정 악역 배우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아닐까.
  시대는 달라도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동류를 조조가 함부로 죽인 일이
음험한 원한으로 뒤시대의 학자와 문사들을 자극해 그 나쁜 쪽으로는 과장은
물론 왜곡까지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은 아닐까. 탁류인 환관 출신, 군벌,
정통성의 결여, 그밖에   그 어떤 조조의 단점보다도 그런 원한이 은연중에
대중들에까지 옮아 오늘날의 조조상이 만들어진 것이나 아닐까.

 

(장비의 죽음)

낭중으로 돌아간 장비는 장비대로 한맺힌 동오를 치기 위한 채비에
들어갔다. 관공의 원수갚음을 앞세우기 위해 모든 군사에게 입힐 흰 갑옷과 흰
군복에 흰 깃발을 마련하되 사흘 안으로 마련해 올리게 했다.
  장비가 그런 영을 내린 다음날이었다.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장수 두
사람이 장비의 군막을 찾아왔다.
  갑옷과 깃발을 만들어 댈 일을 맡은 범강과 장달이라는 말장들이었다.
  "수만 군사가 쓸 흰 깃발과 흰 갑주를 한꺼번에는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기한을 좀 넉넉히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나 장비는 대뜸 화부터 먼저 냈다.
  "나는 원수 갚는 일이 급해 내일 당장이라도 그 역적놈들 땅에 이르지 못하는
게 한이 될 지경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감히 내 장령을 어기려 드느냐?"
  그리고는 둘을 나무에 매달아 등허리에 쉰 대씩이나 채찍질을 했다.
  "내일까지 모든 걸 갖추어라! 만약 어길 때는 너희 둘을 여럿 앞에서
목베겠다."
  매질이 끝난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둘의 입을 때려 피탈까지 내면서
그렇게 으름장을 놓아 돌려보냈다.
  기한을 늘리려 갔다가 죽도록 매질만 당하고 돌아온 범강과 장달은 분하고도
기가 막혔다. 가만히 만나 의논하는데 범강이 먼저 말했다.
  "오늘이야 이미 받을 벌을 다 받았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성미가 급하기 불과 같으니, 내일까지 모든 걸 갖춰 놓지 못하면 우리 두
사람은 어김없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이네."
  그 말에 장달이 부드득 이를 갈며 내뱉었다.
  "저가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는 우리가 저를 죽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그렇지만 그자 가까이 갈 수가 없지 않나?"
  범강 또한 이미 악에 받친 탓인지, 그런 엄청난 말에도 놀라는 기색없이
되물었다. 장달이 어쨌든 해보기나 하자는 투로 말했다.
  "우리 둘이 죽지 않게 되어 있으면 그자가 취해 자빠져 잘 것이고, 우리 둘이
모두 죽어야 할 팔자라면 그자가 취해 있지 않겠지."
  그리고 둘은 한 번 뻗대보기나 하다 죽자는 심경으로 의논을 끝냈다.
  한편 장비는 그날 밤따라 정신이 어지럽고 까닭없이 어찔어찔해 몸놀림이
둥둥 떠 다니는 듯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부장을 잡고 물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가슴이 까닭없이 놀라 뛰고 살이 떨려 서나 앉으나
편치가 않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군후께서 관공을 너무 생각하시어 그럴 것입니다. 잠시 잊고 술이나
드시지요."
  부장은 별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고 술을 가져왔다. 장비도 그럴 듯이 여겨져
부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장비는 자신도 모르게 몹시 취했다. 그대로 장막 안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초저녁부터 장비의 움직임만 살피고 있던 범강과 장달이 그걸 안 것은 초경
무렵이었다. 하늘이 자기들을 도운 것이라 믿은 둘은 각기 몸에 짧은 칼을 한
자루씩 감추고 장비의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지키던 군사가 가로막았으나,
장비에게 알릴 중한 기밀이 있다는 거짓말로 둘은 일없이 장비 곁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비 곁에 이른 둘은 깜짝 놀랐다. 장비가 두 눈을 뜨고 수염을
곤두세운 채 누워 있지 않은가.
  원래 장비가 눈을 뜨고 자는 버릇이 있음을 모르는 둘은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한동안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우레 같은 코고는 소리에 곧 장비가 잠들었음을 알아차린 둘은 칼을
뽑아 한꺼번에 장비를 찔렀다. 장비가 한 소리 큰 비명과 함께 숨이 끊어지니
그때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를 노래했다.

  안희에서 독우를 매질했으되
  황건을 쳐 없애 유비를 도왔다.
  호로관에서 먼저 그 이름 천지를 울렸고
  장판교에서는 물마저 거꾸로 흘렀다. 
 
  의로 엄안을 놓아주어 촉을 안정시켰고
  꾀로 장합을 속여 중주를 차지했네.
  오를 쳐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가을풀만 오래오래 낭중의 서글픔을 전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