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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8권중 이문열의 보수 성향이 잘 나타나는 부분...

 

 

이문열이 보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사상의 자식이랄 수 있는 이 책에도 여러군데 그의 보수성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8권에서 관운장이 죽게되는데 그에대한 설명과  평가중

특히, 파란색 부분이 흥미로왔다. 그 부분은  우리나라의 지난 정치 상황과도 여러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암튼, 관우의 죽음 후 그에 대한 평가글 중에 그의 성향을

 잘 드러내는 부분만을 발췌(excerpt)해 기록으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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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감회가 그러하나 이젯사람으로서의 평도 없을 수 없다. 어떤 이는
삼국지연의를 읽으면서 세 번이나 책을 던졌다가 다시 집어들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바로 관공이 죽었을 때요 두 번째는 유현덕이 죽었을 때이며, 마지막은
제갈공명이 죽었을 때라고 한다. 적어도 연의에서는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은연중에 우리 몸에 밴 실증사학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작가의
주관으로 재구성된 연의라 할지라도 유비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 가치 독점이
지나친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알려지기로 유비를 중심한 집단은 그
전성기에조차도 영토, 국부, 민수에 있어서 대략 위의 사분의 일, 오의 절반
남짓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유비가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경제는 한의 황제 중에서 아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이 가운데 하나여서 핏줄에서 정통성을 얻어내려는 야심가들이
끼여들기 좋은 족보에 속했고, 유비가 지향한 것도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에의
부응이 아니라 낡은 세계의 유지 또는 보강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서 정사를 쓴 진수 같은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연의나 평화를 쓰는
이들까지도 조조를 중심으로 얘기를 풀어나가고 싶은 유혹에 종종 빠져들었다.
특히 그런 현상은 근세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져 예컨대 중국의 곽말약 같은 이는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로 내세운 반면, 유비를 보수 반동 집단이 우두머리로
깎아내리기까지 했고, 가깝게는 연전 일본의 작가 진순신도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아 연의를 구성한 적이 있다.
  이 평역 삼국지도 처음 구상 될 때는 거의 그러했다. 그러나 자료수집차
대만에 가서 얼마 머무는 동안 그런 첫 번째 구상은 중대한 수정을 받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만의
이름만 소장 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오홍일 교수의 충고였다.
  "조조를 어느 정도 복권시키는데는 반대 않지만 촉한정통론과 관공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걸 건드리면 그 작품은 연의 삼국지 아닌 다른 어떤
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의 충고가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흘려들을 수 없는 데가 있었다.
  조조의 복권문제나 촉한정통론은 다음으로 미뤄 두고 우선 여기서는 관공의
얘기만 하기로 하자. 상당히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국인도 관공을 말할 때는
우리처럼 관우나 관운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관공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다.
또 관공은 뒷날로 갈수록 높여져 관왕에서 관성대제로, 그리고 마침내는
신으로까지 널리 추앙받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게 하였을까.
  관공의 출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적어도 그리 대단하지
못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는 해량 땅의 한낱 무부로서 젊어서 사람을 죽이고
탁현으로 피해와 살았다는 게 남겨진 기록의 전부인데, 어떤 이는 이런 추측을
하기도 한다.
  곧 해량 땅은 이름난 소금 산지로 그 소금 밀매꾼-소금은 국가의
전매품이었다)들의 뒤를 봐주다가 죄를 짓게 되어 멀리 탁현으로 달아났던
것이라고.
  종종 관공은 학문의 사람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무인인 그의 위엄에 빛을
더해 주고 있으나 그 또한 대단한 것은 못 되었다.
  당시의 흔한 무장들보다는 좀 나았다는 정도로 춘추와 얼마간의 병가서를
읽었을 뿐이었다. 다만 춘추는 깊이 공부해 줄 줄 욀 정도였으며 지금도 그의
초상을 보면 대개 책을 잡고 있는데 그 책은 바로 춘추하고 한다.
  그의 절묘한 무예와 전략도 많은 부분은 뒷사람들의 윤색이라고 한다. 안량과
문추를 죽여 그의 무예는 거의 신비한 경지까지 끌어올려졌으나, 여포, 방덕,
서황 등과의 싸움을 종합해 보면 의심이 가는 데가 많다.
  또 전략에 있어서도 그가 무성으로 기림받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번성 공략작전의 무리만으로도 의심을 받기에 넉넉하다.
  관공의 덕망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미방과 부사인의 배반, 맹달과 유봉의 외면 같은 사건만으로도 그의 인간관계가
그리 원활하지 못했음은 잘 알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최후를 결정적으로 앞당긴
것은 바로 거느리고 있던 장졸들의 이탈이었다.
  모두가 여몽의 교묘한 심리전 탓이라고는 하지만, 심리전이라는게 원래가
덕장을 중심으로 뭉쳐진 군사들에게는 통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그렇다면 관공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국 그의
삶이 보여준 어떤 이념미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어떤 것인지를 추적하기
위해 진수의 평부터 음미해 보자. 진수는 관공의 열전 뒤에 이런 짤막한 평을
덧붙여 놓고 있다.
  <관우는 -장비와 더불어)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일컬어졌으며 세상에서는 범
같은 신하로 알려졌다. 관우는 조공의 은덕에 보답하여 -의로 엄안을 놓아준
장비와 더불어) 국사의 풍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관우는 성정이 너무 거세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 여기는 데가 있었다>
  인간의 훼예표폄은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진수는 짧은 평
속에서나마 관공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질을 모두 집어내고 있다. 곧 조조에
대한 보은으로는 그의 일생을 지배한 의기를, 그리고 성격을 통해서는 또한
일생의 짐이 된 자부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연의에서 관공에게
쏟아진 지은이의 노력과 열정은 거의 모두가 바로 두 가지를 하나의 대중적인
이념미로 형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널리 인정되고 있는 대로 관공을 일생동안 이끈 의기의 원천은 춘추였다.
공자의 개념이 투영된 그 역사책은 죄를 짓고 숨어 다니는 한 젊은 무부를
매혹시킴으로서 이윽고는 중국 민중의 가슴 속에까지 세월이 가도 바래지 않는
이념미의 한 원형을 제공한 셈이었다. 사실 관우의 삶을 살피면 가장 빛나는
부분은 오관참장처럼 의와 연관을 맺는 부분이다.
  때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충성의 형태로, 때에 따라서는 협객 사회의 의리로,
그리고 더러는 신용 있는 채무관계나 분명한 은원으로 나타나는 관공의 의는
본질적으로 소박한 보수주의에 뿌리하고 있다.
  더 큰 정의에서 보면 후한의 사회는 부패와 타락으로 이미 충성의 근거를
상실했지만  전부터 충성해 왔으니 충성을 계속 바쳐야 했다. 그 선악을
삼았으니 끝까지 주인일 수밖에 없었다.
  관공에게는 변혁의 필요성이나 민중의 개념은 거의 고려 밖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변혁을 갈망하고 기대심리에 빠져 있는 그 민중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민중의 움직임에 민감했고 어느 정도는 혁명의식에 유사한 정신과 실천력까지
보인 조조가 갈수록 격하되어, 명대의 어떤 경극 배우는 조조역을 하다가 성난
관중에게 맞아 죽었을 정도가 된 것과 더불어 뒷사람에게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현상이다.
  한 할 일없는 문사의 터무니없는 추측일는지 모르긴 하되, 혹 그것은 역사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중국 민중들의 본능 속에 거듭 쌓여 온 변혁에 대한 불신과
경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보다 거창하고 본질적인 의를 내세우고, 달콤한
실리로 그들을 앞 뒤 없이 꾀어댔던 그 수많은 역사의 새아침들이 기껏 나라의
이름과 제실의 성씨가 바뀐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 때의 실망과 분노가 핏줄을
따라 대대로 전해 진 게 아니었을까.
  진수는 관공을 폄하는 뜻으로 그걸 집어냈지만 관공의 끝 모르는 자부심도
관공의 삶과 인격에 민중적인 매력을 더해 주었음에 분명하다. 벌거숭이 힘의
지배를 받는 난세일수록 자부심 같은 고급한 정신의 사치는 지켜내기 어렵다.
  그때그때 강자를 만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야만 살아갈 수 있는 민중들에게는
관공의 그 터무니없는 자부심이 차라리 시원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니,
조조와 손권 같은 인물들에게까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라고 서슴없이
내뱉는 관공의 자부심은 그대로 아름다움이요 신비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옛 맹세를 어찌할거나.

 

  결국 관공은 그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거룩한
순사였다. 어리석음, 고집, 미련스러움, 맹목- 어쩌면 현대인들은 그 죽음에서
그런 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나 그 왜소한 말들이 관공의 무엇 하나를 다칠
수 있으랴.
  관공이 사로잡힐 때 관공이 타고 다니던 말도 함께 마충에게 사로잡혔다.
마충은 그 말을 손권에게 바쳤으나 손권은 관공을 죽인 뒤 마충에게 그 말을
도로 내주었다. 마충은 그 말을 받아 뽑내며 타고 다녔다. 하지만 그 말은 어찌
된 셈인지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며칠 뒤 끝내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관공의 충의가 그 말에도 옮은 것이라 여겨 한결같이 신기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