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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0권- 제갈공명의 죽음과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결사...

 

삼국지 마지막권인 10권에서는 제갈공명이 죽는다.

그의 죽음상황과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남겨둔다.

특히, 역사상 자타공인 최고의 명재상 제갈공명에 대해서

연의의 나관중/ 이문열의 평가가 아주 색다르고 흥미로와 기록으로 남긴다.



출처: http://luxmea.tistory.com/90 [세상의 빛 FIAT LUX]

 

그때 공명은 벌써 엿새째나 기도를 드리고 난 뒤였다. 아직도 주등이
커져 있는 걸 보자 공명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뻤다. 이제 하루 밤만 더
버티면 다시 열두 해의 목숨을 얻게 된다는 희망에 차 머리를 풀고 칼을
짚은 채 빌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한밤중의 일이었다. 진채 밖에서 함성이 일어 강유가 막 사람을
보내 알아보려 하는데 위연이 나는 듯 달려와 공명의 장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렇게 소리치며 공명을 찾아 허둥대던 위연이 잘못 발을 옮겨 그때껏
지켜온 주 등을 엎어 꺼버렸다. 그걸 본 공명이 짚고 있던 칼을 내던지며
한탄했다.
  "죽고 사는게 다 명에 달렸으니 빈다고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제서야 놀란 위연이 황황히 땅에 엎드리며 죄를 빌었다. 성난 강유가
칼을 뽑아 위연을 베려 했다. 공명이 그런 강유를 말렸다.
  "이것은 내 명이 다해 그리된 것이지 위문장의 죄가 아니다."
  그러자 강유도 속을 누르며 칼을 거두었다.
  하지만 주등이 꺼짐으로써 공명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 자리에서 몇
차례 피를 토하더니 침상에 쓰러져 누우며 위연에게 말했다.
  "이는 사마의가 내게 병이 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우리의 허실을
살펴보게 한 것이다. 그대는 어서 달려나가 적을 맞으라."
  그 말을 들은 위연는 곧 군사를 이끌고 영채를 나갔다.
  하후패는 위연이 군사들과 함께 달려나오자 깜짝 놀랐다. 한 번 창칼을
맞대보지도 않고 군사를 돌려 달아났다. 위연은 그런 위병을 20리나
쫓아버린 뒤에야 되돌아왔다.
  공명은 되돌아온 위연으로 하여금 전보다 한층 엄하게 본채를 지키게
했다. 위연이 명을 받고 나간 뒤 강유가 찾아와 문안을 드렸다. 공명은
그를 침상 곁으로 불러 나직나직 말했다.
  "나는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중원을 되찾고 한실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 이 같아 이제 멀지 않아 죽게 되었다. 그전에
그대에게 밝힐 게 하나 있다. 나는 평생에 배운 바를 모두 적어 스물네편
14만1천1백14자의 책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는 여덟 가지 힘써 행할 일과
일곱 가지 경계할 일과 여섯 가지 두려워할 일과 다섯 가지 겁낼 일이 모두
적혀 있다. 나는 그 책을 전하려고 여러 장수들을 살펴보았으나 오직
그대만이 그 책을 받을 만하게 보였다. 그 책을 그대에게 남길터이니 결코
가볍게 오기거나 소홀히 다루지 말라."
  바로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차례 숨을 돌린 뒤 공명이 다시 말했다.
  "나는 <연노>란 걸 만들었지만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연노는
내가 특히 고안한 쇠뇌로 화살 길이는 여덟 치요 쇠뇌 한 벌이 한꺼번에 열
개의 살을 날릴 수가 있다. 모두 도본을 그려 남겨 두었으니 그대가 거기
따라 만들어 한 번 써보도록 하라."
  이어서 공명은 한 가지 당부를 더 보탰다.
  "촉으로 드는 여러 갈래 길은 모두가 거칠고 험해 그리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음평만은 반드시 구석구석 알아두어야 한다. 그 땅은 비록
험준하기는 하나 오래 뒤에는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강유를 내보낸 공명은 곧 마대를 불러들였다.
  "너는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대로 하라"
  공명은 그 말과 함께 마대에게 무언가 귓속말로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었다.
  마대가 나가자 양의가 불려왔다, 공명은 양의를 침상 곁으로 오게 해
비단주머니 하나를 주며 가만히 일렀다.
  "내가 죽으면 위연은 틀림없이 모반을 일으킬 것이다. 위연이 모반을
일으켜 그 싸움터에서 마주치게 되거든 그때 이 비단주머니를 열어 보라.
위연을 목벨 사람이 절로 나올 것이다."
  공명은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대비를 마치자 이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공명이 다시 깨어난 것은 그날 밤이 깊어서였다. 공명은 후주에게도 글을
올려 목숨이 오래지 않음을 알리고 그날 밤으로 그 글을 후주에게 로
띄워보냈다.
  공명이 보낸 글을 받은 후주는 깜짝 놀랐다. 상서 이복을 급히
오장원으로 보내 공명을 찾아보고 문안을 드릴 겸 자세한 뒷일을 물어보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오장원에 이른 이복은 공명을 찾아보고 후주의
명을 전함과 아울러 문안을 드렸다. 공명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내가 불행히도 도중에 죽어 나라에 큰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실로
천하에 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이 없소. 내가 죽더라도 공들은 마땅히
충성을 다해 나라를 보살펴야 할 것이오. 전부터 내려오던 제도를 쉽게
바꾸어서는 아니되며 내가 쓴 사람도 함부로 내쫓지 않도록 하시오. 나의
병법은 모두 강유에게 전했으니 그는 능히 나의 뜻을 이어 나라를 위해
힘을 쓸 것이외다. 나는 이제 아침에 죽을 지 저녁에 죽을 지 모르는
몸이니 마땅히 표문을 남겨 그 모든 걸 천자께 아뢰겠소."
  이복은 그 말을 듣고 총총히 후주에게로 돌아갔다.
  이복이 떠나간 뒤 공명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가만히 본채를 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영채들을
두루 돌아보았다. 얼굴을 스쳐가느 가을바람이 뼛속을 뚫고 드는 듯한
한기를 일으키자 공명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다시는 싸움터에 나서서 역적을 칠 수 없겠구나! 너르고 너른 푸른
하늘아, 너에게도 끝간 데가 있느냐?"
  그리고 오래오래 탄식하며 마지 않다가 수레를 돌려 본채로 돌아왔다.
  그 나들이가 해로웠는지 그 뒤로 공명의 병세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걸
느낀 공명이 양의를 불러 다시 일렀다.
  "마대, 요화, 장익, 왕평, 장의 같은 이들은 모두가 충성스럽고 죽음으로
절개를 지킬 사람들이다. 오래 싸움터를 누볐고 수고로움도 많았으니
모두를 나라가 쓸 만하다. 내가 죽은 뒤라도 모든 일은 그전에 정한 대로
지켜 나가라. 또 이번에 군사를 물릴 때는 천천히 물러나야 할 것이며
급하게 몰려가서는 아니된다. 그대는 지모와 계략을 깊이 아는 사람인즉
여러 말로 당부하지 않아도 되리라. 강백약은 슬기와 용맹을 갖춘 사람이니
뒤따라오며 쫓아오는 적병을 막게 하라."
  양의가 울며 그런 공명의 명을 받아들였다. 공명은 붓, 벼루, 먹, 종이를
가져오게 해 침상에 누운채 후주에게 남길 표문을 썼다.
  <엎드려 듣건대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겪어야 할 일이며 정해진 목숨은
바꾸기 어렵다 했습니다. 멀지 않은 죽음을 앞두고 남은 충성을 다라려
마지막으로 몇 자 올립니다. 신 양은 태어남이 어리석고 옹졸한 데도
나라가 어려운 때에 병부를 맡고 중한 소임을 오로지 하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북쪽의 역적을 치러 나왔으나, 공을 이루기도 전에 몸속
깊이 병이 들고 목숨은 아침 저녁에 걸려, 끝내 폐하를 섬기지 못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한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해 욕심을 줄이시고, 몸을 아껴 백성을 사랑하며, 효도를
선황에 이르도록 하시고, 어지심을 널리 세상에 베푸소서. 현량한 이를
높이 쓰심으로 숨어 지내는 인재를 뽑아 올리시고, 풍속을 두텁게
하심으로써 간악하고 요사스런 것들을 물리치소서.
  신의 집에는 뽕나무 8백 주와 밭 쇤 고랑이 있어 자식들이 먹고 입기에는
넉넉했습니다. 신이 조정밖에   있게 됨에 이르러는 이 한몸에 쓰이는 것이
모두 나라에서 나오니 따로이 재산을 모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신이 죽는
날에도 안으로는 남는 베 조각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남는 재물이 없게하여
폐하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명은 쓰기를 마친 뒤 또다시 양의에게 일렀다.
  "내가 죽더라도 발상을 하지 말라. 큰 상자 하나를 만들어 그 안에 내
시체를 앉히고, 쌀 일곱 알을 그 입에 넣으며 다리 앞에는 등잔 하나를
밝히라. 군사들은 여느 때처럼 흔들림이 없게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장성을 떨어지지 않으리니, 죽은 ㅐ
혼이 일어나 그 별을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장성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의심이 일어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때
후군을 먼저 보낸 뒤 한 영채 한 영채씩 천천히 물러나라. 만약 그래도
사마의가 뒤쫓아오면 그대는 얼른 진세를 펼치고 깃발을 돌려 세우라.
그리하여 사마의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내가 전에 내 모양을 닮게 깍아 둔
목상을 수레 위에 얹고, 또한 전에 하던 것처럼 대소의 장사들을 시켜 그
수레를 밀고 나가게 하라. 그걸 보면 사마의는 틀림없이 놀라 달아날
것이다."
  양의는 공명이 시키는 걸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겼다.
  그날 밤 공명은 다시 한 번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장막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북두성을 올려다보다가 그 곁의 한 별을 손가락질하며 한스럽게
말했다.
  "저게 나의 별 장성이다."
  여럿이 그 별을 보니 그 빛이 흐리고 어두우며 금세 떨어질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공명은 다시 칼로 그 별을 겨누며 입으로 무언가르
읊었다, 그리고 읊기가 끝나자 급히 장막 안으로 돌아가더니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장수들이 놀라 허둥거리고 있는데 상서 이복이 다시 돌아왔다. 이복은
공명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말을 못하게 된 걸 보고 크게 소리내어 울며
탄식했다.
  "내가 나라의 큰 일을 그르쳤구나!"
  그러나 공명은 얼마 안돼 다시 깨어났다. 겨우 눈을 떠 주위를
돌아보다가 이복이 되돌아와 침상 곁에 있는 걸 보고 힘들여 목소리를
짜냈다.
  "나는 진작 공이 되돌아올 줄 알았소."
  이복이 고마워 어쩔 줄 모르며 공명에게 말했다.
  "저는 원래 승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구에게 큰 일을 맡겨야 하는
가를 물어보라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쁘게 설치다 그럴
여쭙지 못하고 여길 떠났기에 이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완을 나 대신으로 쓰는 게 좋을 것이오."
  공명이 미리 생각해 둔 대로 밝혔다.
  이복이 다시 물었다.
  "장완 다음으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비위로 하여금 잇게 하면 될 것이오."
  "그 뒤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복이 한 번 더 물었으나 공명은 더 대답이 없었다. 심상찮게 느낀
장수들이 다가가 보니 공명은 숨져 있었다. 때는 건흥 12년 가을 8월
열사흘이요, 공명의 나이 쉰넷이었다.
  뒷날 두공부-두보)는 시를 지어 공명을 노래했다.


  어젯밤 별 하나 길게 진채 앞에 지더니
  이 아침 선생이 돌아가신 소식을 듣네.
  위엄 서린 장막에서 호령소리 안 들리니
  누가 다시 기린대에서 공과 이름을
  드러낼 수 있을까
  문하의 3천 객 헛되이 남았고,
  가슴 속의 10만 대병도 뜻 같잖구나
  풀잎 푸르러 보기 좋고 날도 맑건만
  반겨맞는 노랫소리 이제 다시 들을 길 없네
  백낙천도 또한 읊었다.
  선생은 자취 감춰 숲속에 누웠으나
  밝은 주인 삼고초려로 찾아왔네
  물고기 남양에 이르러 마침내 물을 얻고
  용이 하늘 밖을 날자 장마가 쏟아졌다.
  주인은 어린 자식 당부 예절 다하고
  신하는 나라 위해 충의를 기울였네
  앞뒤의 출사표 이제껏 남아
  읽는 이의 옷깃 눈물로 젖게 한다.
  촉에 장수교위를 지낸 요립이란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이르기를 재주가
공명을 따를 만하다 하고 늘상 벼슬이 낮은 걸 불만하며 공명을 원망해
마지않았다. 이에 공명은 벼슬을 떼고 문산으로 내쫓아버렸는데, 공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요립이 울며 말했다.
  "내 이제 좌임-옷깃을 왼쪽으로 맴. 미개함의 뜻)으로 끝나겠구나. 누가
나를 다시 써주겠는가!"
  전에 죄를 짓고 공명에게 쫓겨간 이엄도 또한 슬퍼해 마지않았다. 큰
소리로 울다가 병이 들어오래잖아 죽었다.
  "공명이 다시 나를 써주어서 전에 지은 죄를 씻을 기회를 얻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공명이 죽고 말았으니 누가 나를 써주겠는가!"
  그게 죽기 전에 이엄이 뇌까린 탄식이었다. 원미지-당의 시인)도 시를
지어 공명을 노래했다.
  난세를 다스려 위태로운 주인 돕고
  어린 주인 맡기는 명예로써 받다.
  빛나는 재주 관중과 악의보다 낫고
  묘한 계책 손자와 오자를 앞섰다.
  늠름하구나 출사표
  당당하다 팔진도
  공과 같은 큰 덕 지닌 이
  예와 지금 어디에 있으리


  하지만 이는 옛사람들의 감상이고 뒷날에 이르러서는 다른 이야기도
들린다.
  요즈음 유행하는 민중사관은 조조를 재평가함과 아울러 유비집단 특히
제갈량에 대한 비판과 의심을 여러 가지로 제기하고 있다.
  <한나라는 불한당, 모리배, 폭력배들을 관리로 등용하여 백성을 수탈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부도덕한 계급 집단이었을 뿐이다. 그 한나라를
뒤엎은 조조를 찬탈자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일찍이 중국의 곽말약이 그런 말을 한 이래로 복권되기 시작한 조조는
이제 <혁명가> 또는 <민중의 대변자>로 추켜세워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거기 따라 유비 집단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가치체계에
고집스레 매달린 보수주의자>들이며 <부패하고 타락한 한 왕조를
되일으키려고 애쓴 반동집단>으로까지 격하되며, 그 핵심인물인 제갈량은
<반동집단에 논리를 제공한 몽상가> 또는 <대의보다는 일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가 풍부하고 지배체제의 기반이 잡힌 위나 오보다는 후발
세력집단으로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택했을 뿐인 야심가>로까지
비판한다.
  과연 조조가 한 일 중에는 민중사적 측면에서 볼 만한 게 많고, 혁명가가
개혁자의 모습도 뚜렷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한 야심가, 독재자, 그리고
권위주의자인 조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과연 그에게
민중적이란 말을 쓸 수 있는지 의문이 갈 수도 있고, 또 그 자신은
순수하게 민중적인 의지로 그 모든 일을 했다 쳐도 그의 만년이나 그의
권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위 왕조 또한 앞 대의 부패와 무능을 답습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조조를 무턱대고 추켜올리는 쪽도 무리가 있는
성싶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반대편에 선 제갈량에 관한 논의다.
먼저 그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논의부터 차근차근 들어보자. 요즈음의
논자들은 주로 연의를 통해 빛나는 제갈량의 신화들을 통속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라는 데 의견이 일치하느 것 같다. 예를 들어, 그의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는 삼분천하론만 해도 제갈량의 독창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고급한 식자층에게는 간간이 얘기되던 논의 중의 하나였다고 하며,
그 한 근거로 제갈량보다 먼저 노숙이 손권에게 똑같은 내용의 말을 한적이
있음을 든다.
  꼭 믿을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위략>이란 책에서는 그 유명한 삼고초려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곧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은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갈량이 그 지방의 몇몇 선비와 더불어
유비를 찾아갔다는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은 그때 보여준
제갈량의 남다른 식견에 반한 뒤이며, 제갈량은 다만 그 뒤에야 있는
삼고초려만을 출사표에 실어 스스로를 높였을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 다음 흔히 제갈량을 세속적인 야심가로 의심하는 데 쓰는 근거로는
관우와 형주 문제가 있다. 제갈량이 나타나기 전 유비 집단의 제2인자는
어김없이 관우였다. 도원 결의 자체는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나 관우는
어쨌든 유비와 <한밥상에서 먹고> <한침상에 자는>형제와 같은 사이였고
형주를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주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관우와의 권력투쟁에서 제갈량이 최초로 우위를 차지ㅏ는 것은
<화용도 사건> 뒤였다. 관우의 성격이나 조조의 잔존세력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관우에게 떠맡기고 굴복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서천정벌에서
관우를 뺀 것은 부득이 했다 쳐도 서천정벌이 완료된 뒤까지 관우가 있는
형주를 소홀히 한 데서도 권력투쟁의 그림자를 찾는 사람도 있다.
  곧 형주는 촉의 중원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군사적 요충인데도 관우로 하여금 거의 독립세력으로 무리한 대위전쟁을
벌이게 한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우가 서천공략에
성공한 제갈량에 대한 경쟁심리로 무모한 싸움을 시작했는지, 정말로
제갈량이 부추겼는지가 명백하지 않고 설령 제갈량이 도우려 해도 20년이나
유언, 유장 두 부자가 다스려 온 땅을 방금 빼앗은 뒤라 실로 그런 힘이
없었을는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의심이 가는 구석은 있다.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진수는 정사의
평에서,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하는
재주나 장수로서의 지략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했고, 첫 번째
기산으로 나갈 때 위연의 제안으 물리친 것도 다른 해석이 있다. 촉과 위는
국력이 거의 열 배나 차이가 나서 제갈량이 시종한 정규전보다는 위연의
제안 같은 기습이 효과를 볼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다. 가정 가은 군사적
요충을 마속 같은 애숭이에게  개인적인 신임만으로 맡기 것도 용병술의
자질을 의심케 하는 일이며, 열세인 군사로 여섯 번의 싸움에서 한결같이
정규전만 고집하고 있는 것도 뛰어난 전략적 재능과는 멀어 보인다.
  연의에서는 신비한 위력을 보이 팔진도라는 것도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있고, 목우, 유마, 연노 같은 무기도 개량한 공은
있을지 모르되 군사적인 천재의 근거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편이 옳다.
  거기다가 연의에서 보이는 술사나 이인 같은 일면은 제갈량의 신화를
더욱 신빙성 없이 만들고 있다. 그는 바람을 빌고, 신장-남만에서 싸울때-
을 부리며,구름을 마음대로 부르고-사마의와의 싸움- 하늘의 별을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놓는다.
  그를 추키기 위한 문사의 발상이 과학과 합리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원래 있던 제갈량의 비범함까지 의심쩍게 만들어 버린 셈이다.
  하지만 조조를 무턱대고 민중적인 영웅으로 추켜올리는 데 무리가 있는
것처럼 제갈량을 턱없이 깍아내리는 것도 무리이기는 마찬가지인 성싶다.
그 첫 번째 근거는 정사에서의 비중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사관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진수의 삼국지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서는 그 시대를
기록함에 있어 제갈량에 선주인 유비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 진수는 바로 그 제갈량에게 죽임을 당한 진식의 아들이면서도 이런
평을 남겨놓고 있다.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듯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를 따랐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지었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비록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주었으며, 교묘한 말로 변명하려 드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벌주었다.작은 일을 작다하여 포상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나쁜 짓도 작다하여 꾸짖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곰곰이 살펴 행하고 사물은 그 근본을 헤아려 다스렸다. 명분을 따르되
실질도 잃지 않았고, 거짓된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이 모두 두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다스림과 죄 줌이 비록
엄해도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씀이 공평하였으며 경계하는
것과 권하는 것이 뚜렷해서였다.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할 만하다. 관중이나 소하에 견줄 만하다....>
  제갈량이 젊어 몰두했던 법가의 한 이상을 보는 듯하다. 거기다가 한
나라의 승상이면서 재산이 겨우 뽕나무 8백 주에 밭 쉰 고랑이라는 그
검소와 무욕을 상기하면, 다른 모든 걸 젖혀두고라도 빼어난 인물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제갈량의 군사적인 재능은 틀림없이 의심스런 데가 있지만,
그 또한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먼저 염두에 둘 것은 촉의
국력에 관계된 그의 군사적인 입장이다.
  통상으로 제갈량이 대위전에 동원한 병력은 촉의 전력에 가까웠다.
사마의처럼 위의 병력 일부만 가지고 나온 경우에는 군사적인 모험도
가능하고 기공도 써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이끈 병력의 승패가 나라의
흥망과 직결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모든 작전에서 신중하고 세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위연의 제안을 무시한 공명의 정당성이 발견되며
군사적인 무능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히려 국력이 거의 열 배나 강한 위를 상대로 싸우면서 시종 공세로
일관하고 있음을 보면 비범한 군사적인 재능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야심가로서 그가 받는 의심도 대개는 뒷사람의 공론인 듯한 혐의가 짙다.
지난날의 동학들이 위에서 아직도 하찮은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도대체 그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가 있길래..."
  하고 탄식했다는데, 그것은 그의 선택이 반드시 자신을 비싸게 팔 수
있다는 이 점만을 보고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은연중에 엿볼 수 있게 한다.
또 그가 권력 추구에만 급급한 야심가였다면 마침내 대권을 잡은 뒤에는
반드시 보상심리에 따른 행태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도 그는
결백하다. 허수아비 같은 후주에게 그가 바친 충성이나 세속적인 욕망에서
초연했던 일상생활만으로도 변호는 충분하다.
  관우의 권력투쟁은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권력욕보다는
한 법가로서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한 것이었으리라. 형주문제도 그렇다.
당시 그가 정벌을 끝낸 서촉은 유언과 유장의 20년 통치가 있었던 땅인데,
그것도 유언은 한때 그 덕망으로 천자에 추대될 뻔했던 인물로서 그 땅
백성들의 숭앙을 받았다. 공명이 관우를 도우러 가고 싶어도, 있을지
모르는 유장파의 저항 때문에 함부로 서천을 비울 수가 없었다는 편이
옳다.
  그의 보수적인 측면 또는 반동적인 이상에 대해서도 그리 함부로 말할
성질이 아닌 듯싶다. 보수와 진보, 혁명적인 것과 반동적인 것은 그 사람의
기질이나 성장환경 또는 이념 형성과정의 문제이지, 정부나 선악의 문제는
아니다. 더구나 근2천 년뒤의 사람으로서 오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의지해 옛사람의 이상을 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뿐더러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그 경우 대개는 역사보다는 현실의 목적성에 기울어져 옛사람의 생각
그 자체보다는 현재 그 자신의 주장을 선전하거나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발명가나 신비한 술사로서의 묘사도 반드시 제갈량의 면모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무기의 우열이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점을 생각하면, 그게 실질적인 창안이건 다만 개량에 지나지 않건 제갈량이
그쪽에 힘을 쏟은 것은 한 군략가로서는 오히려 당연하지 않을까. 비를
비느니 바람을 부르느니 하는 요술 같은 일도 따지고 보면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현대전에서도 장기 일기예보는 매우 중요해서 몇몇 전쟁은 그 일기예보에
승패가 정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옛 중국의 병가들은 천시 또는
지리라는 이름으로 지형과 기후를 중히 여긴 전통이 있고, 제갈량도
마찬가지여서 거기 관해 세밀한 관찰과 정보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의 특정한 기상상태는 단기적으로 예보가 가능했을
것이며, 그 예보를 전쟁에서 활용한 걸 신화화한 것이 연의에서 보는
제갈량의 신통력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실제로 적벽대전을 앞두고
그가 빌었다는 동남풍은 해마다 그 무렵 양자강 일대에 이는 무역풍의
일종이라는 말도 있다. 그 일대에서 살아온 그는 일찍이 그런 현상을
관찰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알맞은 연출과 함께 활용한 것이라는 게 뒷
사람의 추측이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제갈량의 상을 맞춰 보면, 그는 군주의 뛰어난
보좌역이며 명참모, 명재상이었고, 당대 최고봉의 병가인 동시에
법가로서의 이상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뒷 사람의
부질없는 논의는 다만 제갈량이란 혼자 않는 역사의 석상을 스쳐가는
세월의 비바람이요, 고색창연함을 더하며 쌓이는 먼지와 이끼일 따름이다.

 


 

----결사------


  하늘 아래의 큰 흐름은 나뉘면 다시 아우러지게 되어 있다던가, 이로써
이웃나라 솥발처럼 나뉘고 꽃답고 빼어난 이들 구름같이 일어 다투며 치닫던
온해는 다했다. 착안 이 모진 이 가릴 것 없이 모두 죽고, 힘센 이 여린 이며
고운 이 미운 이 또한 모두 죽어 이제는 한결 같이 끝모를 때의 흐름 저쪽으로
사라졌다.
  부질없을진저, 그들의 빛나는 꿈 큰 뜻 매운 얼을 추켜세움이여, 이미 그
몸이 스러진 뒤에 낯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이름이 뜻있다 한들 그
얼마이겠으랴. 그걸 위해 한 번뿐인 삶을 피로 얼룩지우거나 모진 아픔에
시달리고, 또는 외로움과 고단함 속에 내던진 그들이 저승에서 뉘우치고 있지
않다 뉘 잘라 말할 수 있을 것이랴.
  까닭모를 레라, 그들의 어리석음이며 어두움과 못남을 뒤에 살아 깎아 내리고
꾸짖음도, 누군들 하늘과 땅의 고임받는 아들따로 태어나, 더러운 이름 아래
죽고 업신여김 속에 되뇌어지기를 바랐으랴. 한 자투리의 땅이나 몇 닢의 돈에
그 뜻을 팔고, 끝을 날카롭게 한 쇠붙이나 무리의 힘에 눌려 남 앞에 무릎꿇을
때 하마 그 마음이 단근질이 없었는지 어찌 알랴.
  그러하되, 헛된 매달림일지라도 없음보다는 있음이 값지게 여겨져야 하고
그게 우리의 좀스러움이 될지라도 가림과 나눔은 뚜렷이지켜져야 한다. 우리가
있음에 껴 있기 때문이요, 아직도 뒤를 이어 이 땅을 살아야 할 우리가 끝없이
남아 있기 때문이며, 그 삶은 어둠보다는 밝음에, 굽음보다는 곧음에
이끌어져야 함을 우리의 지난 겪음이 일러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주어진 동안만을 모였다 흩어지는 없음으로 보기보다야
비록 있음의 빈 껍질일지라도 길이 남는 이름을 믿는 게 한결 든든하지
않겠는가. 이름이라도 기림받는 이름을 가꾸어 삶을 아득한 없음에서 건져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런 애씀 가운데서 이 살이가 더욱 밝고 따뜻하고
편해지도록 서로를 북돋우고 뒷사람을 부추기는 게 작은 대로 앎을 가진 이의
할 바가 아니겠는가.
  무릇 말과 글의 쓰임은 여러 갈래이나, 이로써 이웃나라, 흘러간 때, 스러진
삶에 여러 낮 여러 밤을 친 한 작은 구실로 삼으며, 아울러 옛사람의 긴 노래
한 가락으로 그 어지러운 처음과 끝을 얽어본다.

  한고조 칼 빼들고 함양으로 드니
  불타는 붉은 해 부상에 뜨고,
  광무제 크게 일어 뒤를 이으니
  그 해 하늘 가운데 높이 솟았다.
  슬퍼라, 헌제 천하를 물려받음이여.
  한의 해 함지 곁에 짐이로구나.
  하진이 꾀 없어 나라 어지럽자
  양주의 동탁이 자리잡네
  왕윤이 계책 써서 역적의 무리 죽이니
  이각과 곽사 다시 창칼을 드는구나.
  도적은 사방에서 개미떼처럼 일고
  온 세상의 간특한 영웅 매처럼 나래친다.
  손견 손책은 강남에서 일어나고
  원소 원술은 하량에서 떨쳐 서며
  유언 부자는 파촉에 근거하고
  유표의 군사는 형양에 머무르네
  장수 장로는 남정을 움키고
  마등 한수는 서량을 지키며
  도겸 장수 공손찬도 각기
  웅재 떨쳐 한 땅을 차지했네
  조조는 권세를 오로지해 승상되더니
  뛰어난 인재 모아 문무로 썼다.
  사나운 군사 휘몰아 중원을 휩쓸었다.
  누상촌 현덕은 원래가 황손
  관우 장비와 의를 맺어 천자 돕기 원했으나
  동서로 뛰어다녀도 근거할 땅 없는데다
  장수 적고 졸개 모자라니 떠돌이신세였다.
  남양 땅 세 번 찾으니 그 정 얼마나 깊은가
  와룡선생은 한눈에 천하의 나뉨을 알아보네
  먼저 형주 뺏고 뒤에 서천 차지하니
  패업과 임금의 길 거기에 있었다.
  안됐구나, 유현덕은 삼 년 만에 죽게 되니
  백제성에서 어린 자식 당부 그 슬픔 컸으리라.
  공명은 여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가,
  힘을 다해 천자를 도우려 했으되,
  어찌 알았으랴, 받은 목숨 거기서 끝나
  긴 별 한밤중에 산그늘로 떨어지네
  강유 홀로 그 기력 높음만 믿고,
  아홉 번 중원을 쳤으나 헛되이 애만 썼다.
  종회와 등애 군사를 나눠 밀고 드니
  한실의 강산, 조씨 것이 되었네
  조비로부터 4대 조환에 이르러
  사마씨가 다시 천하를 가로챔에
  수선대 앞에는 구름과 안개 일고,
  석두성 아래는 물결조차 없었다.
  진류왕이며 귀명후 안락공 같은 이들
  그 왕공 벼슬은 그런 뿌리에 나온 싹이네
  어지러운 세상일 끝난 데 알 수 없고
  하늘의 뜻 넓고 넓어 벗어날 수 없어라
  천하 솥발처럼 나뉘었던 일
  이제는 한바탕 꿈으로 돌아갔건만,
  뒷사람이 슬퍼함을 핑계로 부질없이 떠드네.